세종이 이계전(李季甸)·김민(金汶)에게 명하여 《자치통감강목훈의 資治通鑑綱目訓義》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를 간행하고자 그의 둘째 왕자인 진양대군(晋陽大君) 유(瑈:뒤의 세조)에게 대자(大字)를 쓰게 해서 자본(字本)으로 삼고 연(鉛)으로 주조한 활자이다. 이 활자의 명칭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자치통감강목훈의》가 1436년 7월 29일부터 1438년 11월 사이에 편찬, 간행되었으니 그 기간 동안에 자본이 쓰여 주조, 인출된 것으로 그 시주(始鑄)시기를 1436년으로 보는 경우 그 해가 병진(丙辰)이니 ‘병진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와는 달리 그 시기가 추측에서 나온 것이니, 간행본인 《자치통감강목훈의》 중에서 강(綱)만이 진양대군 유의 글씨이므로 ‘강자(綱字)’로 일컬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강자에서는 《자치통감》 이외에 《동국통감》·《춘추》·《역학계몽》 등의 인본이 있어 고유한 활자 명칭으로 삼기에는 알맞지 못하다.
이 활자가 이루어진 동기는 《자치통감강목훈의》의 편찬, 간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치통감강목》은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사마 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을 토대로 정통과 비정통을 가려서 춘추(春秋)의 체계에 따라 주자학적인 견지에서 강목(綱目)의 형식으로 편찬한 것이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주자학이 학계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특히 세종이 애독하고 신하들에게 읽기를 권장하였다. 한편, 세종은 이 《자치통감강목》의 풀이가 미진하고 구두점이 명확하지 못하여 보기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자, 집현전 문신들에게 명하여 강목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사건마다 주를 달아 보기에 편하도록 강목의 훈의(訓義)까지 만들게 하였다.
이는 사정전(思政殿)에서 훈의한 것이라 하여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 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으로 일컫기도 한다. 편찬은 이계전·김민 등이 주관하고, 집현전 부교리 이사철(李思哲), 수찬 최항(崔恒) 등의 수교(讎校)를 거쳐 3년 만에 완성되었다.
이것은 바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요약한 것으로서 실로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 책이 완성되자 세종은 그 간행에 필요한 종이 35만 권(700만 장)을 중앙과 지방에 만들게 하여 총 권수 139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간행해 냈다.
이 때에 중간 글자와 작은 글자는 갑인자(甲寅字)를 사용하고, 강(綱)의 대자는 진양대군에게 글씨를 써서 연으로 주조하게 하였다. 이는 연을 녹여 주형(鑄型)에 의해 활자를 제작한 범연위자(範鉛爲字)로서는 최초의 것이 된다.
한때 이를 《용재총화 慵齋叢話》에 근거하여 동활자가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었지만 결국 《문헌통고 文獻通考》에 근거하여 연활자임이 고증을 통하여 확실히 밝혀졌다. 병진자는 《자치통감강목훈의》를 찍어내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이 《강목》 이외에는 아직 다른 간행본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활자의 크기는 크고 작은 것에 큰 차이가 있으며, 제일 큰 것이 3㎝, 제일 작은 것이 1.5㎝이나 평균적으로 너비 3㎝, 높이 2.1㎝가 가장 많다. 초인본은 그 자체가 매우 정교하고, 상하의 흑어미(黑魚尾)가 하향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한편, 중종·명종 연간에 인출된 간본의 활자는 대자(大字)에 목륜(木輪)이 보이며, 갑인자의 중자·소자는 마모가 심하고 보자(補字)가 많을 뿐더러 어미에 삼엽화문(三葉花紋)이 있고, 또한 지장(紙張)이 판이하다.
초인본을 모인(模印)한 또 하나의 후인본으로서는 강을 방병진목활자(倣丙辰木活字)로, 목(目)을 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로 인출한 선조 초의 활자본이 있다. 그 밖에도 초인본을 번각한 목판본이 많이 통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