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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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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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년 갑진년에 왕명으로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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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484년 갑진년에 왕명으로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
내용

신묘자(辛卯字)고도 한다. 당시 주로 사용하던 갑인자와 을해자는 활자가 너무 커서 종이와 자재가 많이 들어 불편하였고, 또한 주조한 지 오래되어 마멸되거나 부족한 글자가 생겨 보주(補鑄)하여 써야 했기 때문에 인쇄 상태가 처음과 같이 깨끗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활자에 바로 앞서 주조한 을유자는 글자 모양이 균정하지 않아서 인서(印書)하기를 꺼렸다.

이에 1484년(성종 15) 갑진년에 왕명을 받아 행상호군(行上護軍) 이유인(李有仁), 도승지 권건(權健)을 감독으로, 전적 이세경(李世卿), 별좌(別坐) 이점(李坫), 박사 유정수(柳廷秀), 학정(學正) 안윤덕(安潤德), 정자(正字) 김석정(金石靖) 등을 배치하고, 내장(內藏)의 『구양문충공집(歐陽文忠公集)』과 『열녀전(烈女傳)』을 자본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행사맹(行司猛) 박경(朴耕)에게 닮게 쓰도록 하여 만든 것이다. 1484년(성종 15) 8월 24일에 시작되어 1485년 3월에 마쳤다. 글자 수는 대소 30여 만자로, 다른 활자보다 작고 해정(楷正)하고 아름답다. 이 활자로 처음 찍어낸 『왕형공집(王荊公集)』은 마치 구슬을 꿴듯하다고 하였다.

자본으로 한 『열녀전』에 대해서는 한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고열녀전』 7권인지, 명나라의 해진(解縉) 등이 지은 『고금열녀전』 3권을 말하는 것인지 논란이 있어왔다. 이인영(李仁榮)은 그 중 『고금열녀전』을 자본으로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1471년(성종 2)에 신묘자가 만들어졌는데 『구양공집』을 자본으로 하고 자체가 경자자보다 작으며 더욱 정교하다고 하였다. 또한 『정조실록』에도 “성종조에 신묘자와 계유자(癸酉字)가 있었는데, 이 활자들로 궁중에서 『용비어천가』·『치평요람(治平要覽)』·『주자대전』 등을 인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두 기록의 신묘자는 갑진자의 주조연대를 1471년 신묘로 잘못본 데에서 붙여진 명칭으로, 일반적으로 김종직(金宗直)의 「신주자발(新鑄字跋)」에 언급된 1484년 갑진의 주조설을 따른다.

갑진자는 갑인자·을해자 다음으로 오래 사용되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인본으로는 『왕형공시집(王荊公詩集)』·『동국통감(東國通鑑)』·『신편고금사문유취(新編古今事文類聚)』 등이 있다. →금속활자, 활자

참고문헌

『성종실록』
『정조실록』
『용재총화(慵齋叢話)』
『한국고인쇄사』(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6)
「甲辰活字について」(末松保和, 『書物同好會會報』 5, 1939)
『내사본판식 고문서 투식 연구』(심우준, 일지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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