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경 圓覺經≫을 간행하기 위하여 주조한 활자로, 구결(口訣)을 달기 위하여 한글활자도 만들었는데, 이것을 ‘을유한글자’라 한다.
그 주조 사실은 ≪세조실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김종직(金宗直)이 쓴 갑진자(甲辰字) 주자발(鑄字跋)에 “을유자는 그 자체가 단정하지 못하고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쓸 수 없다.”라는 간단한 기록이 보인다.
또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慵齋叢話≫에는 “세조 11년에 ≪원각경≫을 인출하고자 정난종에게 자본을 쓰게 하여 주조한 활자가 을유자인데, 그 자체가 매우 고르지 않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조는 즉위 10년에 원각사(圓覺寺)를 짓기 시작하는 한편,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에게 명하여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을 교수(校讎)하게 하고, 다시 이를 인출하기 위하여 을유자를 주조하게 했다.
정난종은 송설체(松雪體)의 해서(楷書)에 능하여 창덕궁(昌德宮) 안의 여러 전문(殿門)의 편액 또는 봉선사(奉先寺)의 종명(鐘銘) 등을 썼던 당대의 명필가였다.
그러나 이 송설체의 글자가 진체(晋體)처럼 해정(楷正:글씨체가 바르고 똑똑함)하지 못하여, 그 글자체를 바탕으로 주성한 을유자도 단정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484년(성종 15)에 갑진자를 새로 주조할 때 녹여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을유자는 글자 모양이 단정하지 않아 인쇄하기를 꺼려 하였고, 겨우 20년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 인본(印本)이 많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구결원각경 口訣圓覺經≫을 비롯하여 육경합부(六經合部) 중의 ≪금강경계청 金剛經啓請≫·≪보현행원품 菩賢行願品≫·≪관세음보살예문 觀世音菩薩禮文≫ 합편, ≪벽암록 碧巖錄≫·≪병장설 兵將說≫·≪당서 唐書≫ 등이 있을 뿐이다. →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