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예조판서, 좌참찬,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듬 해 한성부좌윤으로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1467년 호조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이듬 해 대사성이 되고, 예종이 즉위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5년(성종 6) 이조참판이 되어『삼국사절요』를 편찬하여 바쳤으며, 이 해 덕종의 부묘문제(祔廟問題)가 일어나자 적극 반대하였다. 이듬 해 지중추원사로 정조사가 되어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했으나, 평안도로 이주시킨 남도의 백성들이 흩어지자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480년 다시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예문관제학이 되고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예조판서 때 직무수행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왕으로부터 서각띠[犀角帶]가 하사되었고, 품계도 숭정대부(崇政大夫)으로 승진되었다.
1485년 좌참찬을 거쳐 우찬성이 되고, 이어 좌찬성에 올랐으나 폭음으로 죽었다. 젊은 나이에 벼슬이 높았으나 교만하거나 뽐내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또한 자질이 호탕, 활달하며 총명하고 특히 담론을 잘 했다. 성리학에 밝았고 고제(古制)에 해박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시호는 명헌(明憲)이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해동잡록(海東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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