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읍성의 규모는 동쪽 벽이 180.6m, 서쪽 벽이 174.7m, 남쪽 벽이 197.5m, 북쪽 벽이 219.4m로, 전체 둘레는 772.2m이다. 성은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서쪽과 북쪽은 능선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편축식으로 쌓았다. 평지 지역은 외측에 면석을 쌓고 뒷부분에는 등성을 위해 성토한 전형적인 조선시대 읍성의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전체적인 외형은 말각방형(抹角方形)에 가깝고, 성 내부 면적은 약 36,000㎡이다.
성벽 하단부의 폭은 710m이며, 상단부 폭은 23.5m이고 높이는 대체로 3~4m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각 구간별로 성벽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결과 외벽은 석축으로 쌓고 내부는 토사를 다져 쌓은 내탁식 구조임이 확인되었다. 성벽의 축조는 풍화 암반을 정지한 뒤 내외벽 기단석을 놓고, 점토 다짐으로 정지한 뒤에 외벽을 축조하면서 뒤채움 돌을 부가하였다. 마지막으로 외벽 축조 후에 내벽에 경사지게 점토 다짐을 하여 내탁식의 성벽을 완성하였다. 성벽 조사 과정에서 유물이 확인되지 않아서 정확한 축성 시기는 확인하기 어렵다.
안산읍성의 축성과 관련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안산군 조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1438년(세종 20)에 반포된 ‘축성신도(築城新圖)’에 따라 축조된 하동 읍성, 언양 읍성 등과 유사하다. 한편 동쪽 벽 일부 구간에는 외벽과 내벽을 흙으로 다져서 토성처럼 보이는 부분이 확인되는데, 이는 후대의 개축 흔적으로 볼 수도 있다.
현재 문지는 북문지 1개소만 확인되지만, 읍성의 주 출입구는 지형으로 보아 남쪽 방향이라는 점에서 남문지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민가가 형성되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북문지는 별도의 시설 없이 성벽이 단절되어 개방된 상태였는데 발굴 조사 결과 관련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와 등의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루가 없는 개거식 또는 암거식 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읍성 북문지 서쪽 북벽과 서쪽 벽의 회절부에는 장대지로 추정되는 3∼4단의 석축부가 확인된다.
읍성 내부에는 정문인 평근루(平近樓), 객사와 동헌, 옥사와 창고가 위치하였는데 모두 철거되었다. 그렇지만 발굴 조사를 통하여 성 내부 남동쪽 지역에는 다수의 건물지들이 조사되었다. 안산읍성 내부에서 확인된 시설 중에서 목빙고의 존재도 주목된다. 안산읍성의 목빙고는 장축이 1.5m, 단축이 6m의 세장방형으로 빙고 내부의 벽체는 할석으로 조성하였고 한 차례 북동벽 안쪽으로 좁혀서 개축된 흔적도 확인되었다. 경주, 안동, 창녕, 청도, 현풍, 영산에 석빙고와 함께 홍성 오관리와 부여 구교리에서 조선시대 목빙고가 확인된 바 있다. 안산읍성의 목빙고와 관련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해안에 인접하여 어패류 자원이 풍부한 지리적인 입지를 감안한다면, 안산 어소에서 어물을 한양에 진상하기 위한 얼음 보관 시설로 유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안산 관아는 처음에 목내동 일대에 세워졌는데, 1441년에 현재 위치에 옮겨졌다. 그러나 유성룡의 『서애집』 등을 통하여 임진왜란 당시에 안산 관아는 소실된 것으로 보이는데, 송시열의 『송자대전』 「안산현관사중건기」 등에 의하면 기존 관아가 퇴락하자 안산 현감인 이제두가 선혜청 당상 김좌명의 도움을 받아 1669년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669년에 안산 관아와 읍성이 중건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안산 관아는 이후 수안 면사무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조사된 석재가 전시 중이다.
2010년에는 안산 객사가 복원되었다.
안산읍성은 경기 남부 지역에서 조선시대 읍성과 관아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성이며, 특히 성 내부에서 확인된 목빙고는 조선시대의 안산 지역의 물류와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