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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비롯한 곡물과 포백 · 병기 · 보물 등의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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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쌀을 비롯한 곡물과 포백 · 병기 · 보물 등의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건물.
내용

≪설문해자 說文解字≫·≪석명 釋名≫·≪서경 書經≫·≪예기 禮記≫ 등의 사전과 경전에서는 곡물을 보관하는 곳을 창(倉), 포백·병기·보물 등의 물건을 보관하는 곳을 고(庫)라고 주석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대체로 고려 초기까지는 이와 같은 창과 고의 개념 구분이 그대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로는 그러한 구별이 모호해져서 창에서도 포백·보물 등의 물품을 취급했으며, 고에서도 곡물을 보관하였다.

창고는 잉여물품을 일정 기간 보관했다가 필요한 때에 꺼내 쓰기 위해 마련된 것이므로 그것의 출현은 역사시대 이전의 일로 추측된다. 농경이 시작되었던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물론, 수렵과 어로로 생활하던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초기에도 비록 시원적인 형태이기는 하나 물품을 보관하는 기능을 가진 창고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고의 존재를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에 들어서이다. 3세기 무렵의 고구려에는 집집마다 작은 창고로서 부경(桴京)이 있었고, 백제에는 창고 관리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 곡내부(穀內部)와 내·외경부(內外0xB884部)가 내관(內官)으로 설치되었으며, 신라에도 이와 동일한 기능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창부(倉部)가 있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에도 국가는 물론 개인들도 나름대로의 창고를 구비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창고는 우선 개인 또는 사설집단이 생활에 필요한 곡물과 잡물을 보관하기 위해 설치, 이용했던 사적인 창고와 국가 또는 공공의 관청이 설치·관리했던 공적인 창고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 이전의 경우도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고려 이후 공적인 창고는 다시 그 기능에 따라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 유형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 및 왕실에 부속된 창고로, 그 소속기관의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내장전(內庄田)·공해전(公廨田)·관둔전(官屯田) 등 왕실과 각 관청이 확보하고 있는 토지에서 조세로 수납하는 곡물과 각 기관이 공물(貢物)로 수취하는 각종 물품을 보관하였다.

두번째 유형은 국고로서의 기능을 하면서 경창(京倉)으로 통칭되던 창고로, 이곳에는 전국의 민전(民田)에서 조세로 수취되어 각 지역의 조창(漕倉)을 통해 중앙으로 운송되는 세곡(稅穀)이 주로 저장되었다. 따라서 이들 창고는 수로교통이 편리한 왕도(王都) 근처의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백관(百官)에게 지급할 녹봉을 보관했던 광흥창(廣興倉:고려 전기에는 左倉), 제사(祭祀)·빈객 접대(賓客接待)·기민진제(飢民賑濟) 및 국가적인 역사(役事)와 대상(大喪)의 비용, 즉 국용(國用)의 재원을 보관했던 풍저창(豊儲倉:고려 전기에는 右倉), 군량미를 저장했던 군자창(軍資倉:고려시대에는 龍門倉) 등이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창고이다.

세번째 유형은 전국의 주요 해변이나 강가에 설치되었던 조창으로, 인근 지역의 민전에서 수취한 세곡을 경창으로 운송하기 전에 일시 수납하여 보관했던 곳이다. 고려 때는 충주의 덕흥창(德興倉)을 비롯한 13개의 조창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9개의 조창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네번째 유형은 특수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설치된 창고로, 상평창(常平倉)·의창(義倉)·사창(社倉)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들 창고는 서울은 물론 각 지방에까지 두루 설치되었다.

보관할 쌀과 포(布)의 출납을 통하여 물가를 조절하던 것이 상평창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이의 대여를 통한 빈민의 진휼(賑恤)을 주된 기능으로 하던 것이 의창이며, 의창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조선 초기에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설치되었던 민영의 창고가 사창이다.

그러나 이들 각종 창고의 물품이 반드시 그 본래의 기능에 한정되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군자창의 미곡이 자주 의창곡으로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 다른 창고의 물품이 부족할 때는 그곳으로 대여되기도 했으며, 유사시에는 비상물품으로 조달되기도 하였다.

각종 창고는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일정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사적인 창고와 공적인 창고 중에서도 왕실 및 관청에 소속된 창고의 설비가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규모가 경창이나 조창에 비해 소규모였을 것이며, 따라서 일정한 건물이 구비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경창은 다량의 세곡을 보관해야 했으므로 매우 큰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경창은 창옥(倉屋)이 설비되지 못한 노적창(露積倉)의 형태로 존재하였다. ≪고려도경 高麗圖經≫ 창름조(倉廩條)의 설명에 의하면, 고려의 경창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시설과 방법으로 세곡을 보관했다고 한다.

즉, 담장이 처져 있는 넓은 창터에 여러 자 높이로 토축을 쌓고 그 위에 풀로 엮어 만든 점(苫)을 깐 뒤, 하나의 점에 미곡 1석(石)씩을 여러 길 높이까지 쌓아 올리고, 풀을 덮어 바람과 비를 막는, 이른바 적점법(積苫法)을 사용했으므로 쌓은 모양이 둥근 지붕과 같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적시설은 통풍이 잘 되었으므로 보관하는 미곡의 부패를 방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으나, 담장만 있을 뿐 창옥이 없었기 때문에 늘 도난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러다가 13세기를 전후한 때부터 점차 창옥을 구비하게 되었다. 조창 역시 많은 세곡을 일정 기간 보관해야 했으므로 비교적 큰 규모였을 것이며, 그 시설 및 보관방법 또한 경창의 경우와 비슷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창은 조선 중기 이후에야 비로소 창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한편, 공적인 창고에는 그것을 관리하기 위하여 소정의 관리자를 두고 있었다. 중앙 관청에 소속된 창고는 해당 관청의 관원이, 왕실에 소속된 창고는 환관(宦官) 혹은 조사(朝士)가, 그리고 지방 관아에 소속된 창고와 상평창·의창 등은 각 고을의 수령이 보관물품에 대한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특히, 국고로서의 기능을 맡고 있던 여러 경창에는 이것의 관리를 전담하는 관청을 별도로 설치하고 여러 명의 관원을 두기도 하였다. 조창은 중앙에서 파견된 판관(判官)이 해당 고을의 수령과 함께 그 관리를 담당하였다.

이들 관원 외에도 각 창고에는 창관(倉官)·서원(書員)·고자(庫子)·고직(庫直) 등으로 불리며 창고 관리의 실무를 담당하던 이속층(吏屬層)과, 사령(使令)·군사(軍士) 등의 도예(徒隷)들이 있었다.

이러한 공적인 창고의 물품은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는 것이었다는 중요성 뿐만 아니라, 물품의 출납을 둘러싼 관리들의 부정이 발생할 소지가 많았으므로 소관 물품의 출납이 매우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경창을 비롯하여 서울에 있던 각 관청의 창고는 매월 초 사헌부의 감찰로부터 정기적인 조사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소관 물품의 출납도 출납상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사헌부 감찰의 감독하에 이루어졌다.

이를 청대(請臺)라고 했는데, 그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① 물품을 출납하고자 하는 관청이 사헌부에 청대를 요청하면, ② 사헌부는 담당 감찰을 배정하여 파견하는데, ③ 담당 감찰은 해당 관청의 관원과 함께 출납되는 물품의 수량과 품질 등을 직접 확인하고, ④ 그 사실을 기록한 중기(重記)를 작성하여 호조에 보고하였다.

한편, 지방에 있는 창고는 관할 수령의 책임하에 소관 물품을 출납할 수 있었으나, 그 결과는 관찰사의 감독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절차에도 불구하고 출납상의 착오를 일으키거나 부정을 자행한 관계 관원과 이속들은 영원히 관직에 나올 수 없게 하거나 파직시키는 등 엄중하게 문책하였다.

이 밖에도 수령과 창고의 물품 출납을 관장하던 관원이 전출할 때는 반고(反庫:창고 조사)를 행하여 문서상의 수량과 실제 수량에 차이가 없을 경우에만 그의 이동을 허락하는 원칙도 마련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옛날의 창고라고 하면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각 지방의 항·포·구 등 조창(漕倉)에 세미(歲米)를 집적했다가 중앙으로 해송하기 위해 일시 보관하는 관영창고가 있었다.

1876년 개항과 더불어 항만에 창고 및 보세창고 등이 설치되었고, 그 밖에 농협창고와 주로 철도 수송물자를 보관하는 창고 등의 형태로 운용되어 왔으며, 나머지 창고들은 대부분 영세자유업으로 자영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1960년 이후 고속도로의 건설에 따른 육상 물동량과 해운 물동량의 급격한 증대로 창고업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급속한 발달을 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창고업법>에 따르면 창고의 종류는 1급창고·2급창고·야적창고·수면창고·저장창고·위험물창고·냉동창고 등으로 구분되며, 입지에 따라서는 내륙창고와 임해창고로도 구분된다.

1974년 12월 말에 창고업체는 672개 업체로, 1,237개 동에 약 62만㎡였고, 1980년 12월 말에는 1,792개 업체로, 2954동에 약 122만㎡였으며, 1985년 12월 말에는 2,136개 업체로 3,416동에 약 148만㎡였다. 1988년 12월 말 <창고업법>에 의한 창고업체는 2,024개 업체에 3,246개 동이며, 총면적은 약 149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0년 6월 현재 창고업체의 종류는 일반창고·냉동냉장창고·농산물창고·위험물보관창고·야적창고·기타창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일반창고는 1,439개이고, 냉동냉장창고는 213개이며, 농산물창고는 81개이다.

그리고 야적창고가 39개이고, 위험물보관창고는 18개이며, 기타창고가 15개로 모두 1,805개이다. 이 가운데, 일반창고가 약 80%를 넘고 있으며, 기타창고가 목재하치장·주류보관창고·수면목재창고·보세창고 등 약 5%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1988년의 창고를 기준으로 보면 내륙에 있는 일반창고는 2,005개 업체에 3,173개 동으로 약 1339만㎡이고, 임해창고는 19개 업체에 73개 동으로 약 10만㎡였다. 내륙창고 중에서 양곡보관을 위주로 하는 1급창고는 1,662개 업체에 2,655동이고,약 85만㎡로 전체 창고의 57%를 점하였다. 그 다음은 냉동창고로 75개 업체에 87개 동으로 약 26만㎡, 그리고 야적창고는 25개 업체에 약 22만㎡였다.

또한 임해창고에서는 야적창고가 5개 업체에 약 7만㎡이고, 1급창고는 7개 업체 15동에 1만 3231㎡였다. 우리 나라의 창고의 시설은 대부분 노후하여 규모가 영세한데,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보관기능의 중요성이 더해지고 있다.

창고업이 낙후상태에 있는 원인은 고속도로의 발달로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화물을 운송하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보관요율이 낮은 데 비해 큰 시설투자가 요구되는 데도 채산성이 악화되어 그 부문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창고업의 낙후상태는 수급의 계절적 변동이 심한 농산물·연료·시설재 등의 보관, 저장으로 가격 안정에 기여하는 창고업 고유의 기능에 많은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창고업은 생산 시점과 소비 내지 사용에 제공하는 시점 사이의 기간 동안 보관하면서 상품의 질과 형태를 유지하고 습기나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창고업의 발전은 국내적으로는 원활한 유통과 수급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물가안정에 기여하고, 대외적으로는 우리 나라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데도 지대한 효과가 있다.

곡물, 기타 부패 가능한 식품의 장기 보관이라든지, 각종 첨단산업의 원료·반제품 및 제품의 보관 등 창고업 분야에 신기술의 개발 여지가 많을 것이므로, 이 방면의 신기술 개발에 가일층 노력을 기울여야만 대량생산·대량수송·대량판매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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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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