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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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관아 전경
제주목 관아 전경
건축
개념
관원들이 정무를 보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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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관원들이 정무를 보던 건물.
내용

관서(官署)·공해(公廨)라고도 하며, 또한 순수한 우리말로는 ‘마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좁은 의미로서의 관아에 해당된다.

관아는 원시공동체시대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진 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되나, 문헌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예컨대,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2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41조에는 “4월에 열흘 동안 폭우가 내려 평지에 괸 물이 서너자나 되어 관가와 민가가 파괴되고 산이 열세 군데나 무너졌다(夏四月 大雨浹旬 平地水三四尺 漂沒官私屋舍 山崩十三所).”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관사옥사(官私屋舍)는 관아와 민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삼국의 관료직제를 살펴볼 때 이에 해당되는 무수한 관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문헌인 ≪구당서 舊唐書≫ 권199 상열전 권149 고려조(高麗條)에 “……사찰·신묘·왕궁·관부만이 기와를 사용하였다……(……唯佛寺神廟及王宮官府乃用瓦……).”라 하였는데, 이로써 관아는 왕궁·신묘와 더불어 기와지붕을 덮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관아는 도성에는 물론 각 지방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고려고도징 高麗古都徵≫ 권3 공해조(公廨條)에는 ≪고려사≫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나타난 관아건축의 기록들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있다. 관아의 구체적인 내용은, 현존하는 유구(遺構)가 있는 조선시대 관아건축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한양의 도성에는 최고기관으로 의정부가 있고, 또 백관을 통솔하는 문하부, 왕궁의 군기(軍機) 및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중추원 등과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육조가 있었다.

지방에서는 경기도·충청도 등 팔도와 그 밑에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두고, 이곳에 도의 관찰사(또는 監司)가 소관 마을을 관할하는 부윤·목사·군수·현령·현감 등을 통괄하면서 주재하였던 것이다.

도성에 있는 관아들은 궁궐 안에 있던 것과 궁궐 밖에 있는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동국여지승람≫ 경도편(京都篇)에 보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궐내에는 문직공서(文職公署)로서 의정부·승정원·홍문관 등 다수의 관아와 무직공서(武職公署)로서 오위도총부가 있었다.

또한, 의정부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동편 첫머리에 있었고, 중추원은 광화문 밖 서편 예조 다음에 있었다. 한편, 광화문 밖 동쪽과 서쪽에는 육조가 늘어서 있었는데, 동쪽에는 이조와 호조가, 서쪽에는 예조·병조·형조·공조가 있었다.

도성 안의 관아의 배치와 평면은 현존하는 유구로는 그 본래 모습을 알 수 없는데, 그것은 현존하는 종친부(宗親府)도 주사(主舍)와 좌익사(左翼舍)만 남아 있고, 삼군부(三軍府)도 청헌당(淸憲堂)과 총무당(總武堂)만이 다른 지역에 이건(移建)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성에 있던 관아의 배치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탁지부(度支部)와 형조로서, 이들의 본아전도(本衙全圖)를 보면 주사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어 중앙에 위치하고 주위에 행각이 늘어서 있으며, 특히 당상청(堂上廳) 뒤로 네모난 연못을 파고, 정자형(丁字形)의 정자를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탁지부 주사인 당상청은 12칸으로 사면에 툇간이 있고, 좌우에 아방(兒房)을 4칸씩 두고 4칸의 낭관청(郎官廳)과 입직방(入直房) 3칸, 우방(右房) 2칸, 다주(茶廚) 1칸, 마구간 1칸, 고사(庫舍) 125칸(版籍司庫 52칸, 版別庫 44칸, 歲幣庫 9칸, 雜物庫 9칸, 別例房庫 7칸, 銀色庫 4칸)이 방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지방관아의 대표적인 것은 현감이 주재하고 있던 동헌(東軒)이고 현감의 살림채인 내아(內衙)가 따른다. 또한, 좌수·별감이 집무하던 향청(鄕廳), 육방(六房)의 우두머리가 집무하던 작청(作廳), 회계사무를 관장하던 공수청(公須廳), 군장교의 장청(將廳), 죄를 다스리던 형방청(刑房廳), 노복들의 관노청(官奴廳), 죄인을 가두는 형옥(刑獄) 등이 모두 갖추어 건립되었던 것이다.

상주의 고지도인 <상주성도 尙州城圖>를 보면 읍성 속에 관아들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의 남문(弘治舊樓)을 들어서면 관아의 정문인 태평루 누문이 우뚝 서 있고, 다음의 내삼문(內三門)에 이른다. 태평루의 동쪽에는 군녕청(軍寧廳)이 있고, 서쪽에는 사령청(使令廳)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동헌인 청유당이 자리잡고, 그 앞 동쪽에 공고(工庫)가, 서쪽에 목민관의 살림집인 내아가 자리잡고, 기타 여러 채의 부속채들이 둘러서 있다.

객사인 상산관(商山館)은 공고 동쪽에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있는데, 객사는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망배(望拜)하던 곳으로, 엄밀히 말해 관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19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감영도 京畿監營圖>에서도 전체적인 배치와 각 건물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동헌의 평면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보은동헌처럼 서쪽에 온돌방을, 동쪽에 대청을 두고 대청 속에서 다시 높은 마루를 꾸민 형식, 둘째 울산동헌처럼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을 대청으로 꾸미고 온돌방 앞에 누마루를 둔 형식, 셋째 김제동헌처럼 전칸을 대청으로 꾸미고 대청 중앙에 작은 온돌방 한 칸을 둔 특이한 형식으로 나뉜다.

이들의 평면은 모두 장방형이나, 때로는 강릉칠사당(七事堂)처럼 누마루가 불어 ㄱ자 평면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 내아의 평면구성은 내아가 현감의 가족생활 공간이므로 사대부가의 안채와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다. 즉, 안방·대청·건넌방·부엌·찬방 등으로 구성되며 주위에는 곳간 등의 부속채가 딸려 있다.

도성에 있는 관아건축의 구조양식은 주로 주심포식(柱心包式)과 익공식(翼工式)인데, 익공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장대석 기단의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아두고 두리기둥이나 방주를 세워 익공으로 결구한다.

전면과 측면에는 정자살 창호를 달고 들어열개로 들쇠에 매달게 되어 있고, 지붕은 겹처마로 팔작지붕을 이룬다. 단청은 가칠단청이나 긋기단청으로 한다. 지방관아의 동헌은 익공계가 주류를 이루며 때로 주심포양식으로 꾸미기도 한다.

장대석의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방주와 두리기둥을 세워 창방을 기둥 윗몸에 끼운 뒤, 익공 또는 주심포를 결구한다. 지붕은 겹처마로서 팔작지붕을 이루는데, 용마루·합각마루·추녀마루를 양성하지 않고 단청은 가칠단청을 한다.

내아의 구조는 사대부가의 안채처럼 민도리양식을 이루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장대석 마무리의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이나 다듬은돌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운다. 가구는 오량(五樑)이 일반적이며, 대청의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이고 온돌방은 종이천장이다.

처마는 겹처마 또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마루에는 양성(陽城 : 지붕마루의 수직면에 회사반죽, 또는 회반죽을 바른 것)을 하지 않고 단청도 하지 않는다.

관아의 아문은 누문으로서 일층은 대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고, 이층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사방에 창호를 달지 않아 주위를 쉽게 관망할 수 있도록 한다. 때로는 누문인 아문을 지나 다시 대문에 들어서기도 하는데, 이 때의 문은 삼문형식으로 하여 내삼문이라 부른다.

또한, 솟을대문을 중앙에 두고 좌우로 행랑채를 늘어놓기도 한다. 동헌·내아·아문 이외의 부속채들은 대부분 민도리양식을 이루고 있다. 도성에 조영된 관아건축은 주사(主舍)와 좌우익사(左右翼舍)로 구성되고 왕궁·사찰과 같이 화려하지는 않으나 위엄있게 꾸몄다.

특히, 기단은 장대석으로 높게 하여 민가보다는 격을 높이고, 궁궐보다는 낮게 하였으며, 지방관아에서는 누문으로 된 아문으로 위엄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도성의 관아건축은 개인공간의 필요성이 없으나 지방관아에는 공적인 공간인 동헌과 사적 공간인 내아가 공존함이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도경』
『고려도교징(高麗古都徵)』
『동국여지승람』
『한옥과 그 역사』(신영훈, 에밀레미술관, 1975)
「청안동헌」(박태수, 『건축사』 175, 1983)
「官衙建築에 대한 연구」(주남철, 『대한건축학회지』 28-116, 1984)
집필자
주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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