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
내용
객사는 각기 고유의 명칭이 있었다. 평안도의 중화(中和) 객사는 '생양관(生陽館)', 순안(順安) 객사는 '안정관(安定館)', 숙천(肅川) 객사는 '숙녕관(肅寧館)', 안주(安州) 객사는 '안흥관(安興館)', 가산(嘉山) 객사는 '가평관(嘉平館)'이라 불리었다. 현존하는 객사 건물은 조선시대의 목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전기의 객사로는 강릉의 객사문(客舍門, 국보), 전주 객사(보물), 안변 객사의 가학루(駕鶴樓, 1493), 고령 객사의 가야관(伽倻館, 1493), 경주 객사의 동경관(東京館) 서헌(16세기 말) 등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의 객사로는 성천객사(成川客舍) 동명관(東明館)의 강선루(降仙樓), 통영 객사, 여수 객사 등이 남아 있다.
객사는 아전(衙前)들이 맡아 관리하였다. 고려 때, 지방의 잡직(雜職) 가운데 '객사사(客舍史)'라 불리는 아전이 객사를 담당하였다. 고을의 규모에 따라 담당 아전의 수가 달랐다. 1천 정(丁) 이상의 군현에는 4인, 5백 정 이상의 군현에는 3인, 3백 정 이하의 군현에는 2인, 1백 정 이상의 군현에는 1인씩 두었으며, 동서의 방어사(防禦使) · 진장(鎭將) · 현령관(縣令官)에는 각각 2인씩 두었다.
지방 수령은 1월 1일 정조(正朝), 동지, 왕의 탄신일에 객사에 모셔진 전패에 절하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또한 수령이 고을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 반드시 전패에 문안례를 올렸고, 임지에 새로 부임할 때도 전패에 배례하는 것이 순서였다.
변천사항
각 고을의 객사에 봉안한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로, ‘전(殿)’자를 새겼는데, 대한제국기에 국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1896년(건양 1)에 황제를 상징하는 ‘궐(闕)’자를 새긴 나무패인 궐패(闕牌)로 모두 바뀌었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세종실록(世宗實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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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멀리 떨어져 있는 조상, 부모, 형제 따위를 그리워하며 그러한 대상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절을 함. 또는 그렇게 하는 절.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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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한 구획 내에 지은 여러 채의 집 가운데 가장 주된 집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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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본채의 좌우 양편에 딸려 있는 방.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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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고려 시대에 둔, 진(鎭)의 으뜸 벼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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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설날 아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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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웃어른께 안부를 여쭙는 예식.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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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임무를 받아 근무하는 곳.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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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 절하여 예를 표하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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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
: 멀리 떨어져 있는 조상, 부모, 형제 따위를 그리워하며 그러한 대상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절을 하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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