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 ()

서울 풍납동 토성 성벽
서울 풍납동 토성 성벽
건축
개념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 재해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쌓은 구조물. 군사용어.
내용 요약

성곽은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 재해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쌓은 구조물을 가리키는 군사용어이다. 처음에는 도랑을 파거나 흙을 쌓아올려 만들었으나 사람들의 지혜가 쌓이면서 나무로 만든 목책, 돌로 쌓은 석축, 벽돌로 쌓은 전축으로 발전했다. 전형적인 성곽은 이중의 벽으로 구성되는데, 안쪽의 것을 성 또는 내성이라 하고, 바깥쪽의 것을 곽 또는 외성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아 돌로 쌓은 산성이 발달했는데,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축조했기 때문에 중국의 방형이나 서양의 별모양과는 달리 복잡한 평면을 이루는 특징이 있다.

정의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 재해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쌓은 구조물. 군사용어.
개념

성(城)이란 보통 성벽(城壁)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넓다. 처음에는 흙을 파서 도랑을 만들거나 흙으로 쌓았으나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나무로 만든 목책(木柵)과 돌로 쌓은 석축(石築), 벽돌로 쌓은 전축(磚築)도 생겼다.

전형적인 성곽은 네모꼴로 쌓은 성과 다시 그 바깥에 네모꼴로 쌓은 곽(郭)으로 구성되는 이중의 벽으로 구성된다. 안쪽의 것을 성, 또는 내성(內城)이라 하고, 바깥쪽의 것을 곽(郭) 혹은 외성(外城)이라고 한다.

삼중인 경우에는 맨 안쪽을 내성, 다음을 중성(中城), 바깥을 외성이라고 하며, 만약 도성(都城)이면 왕성(王城) · 궁성(宮城) · 황성(皇城)이라 부르고, 그 바깥쪽의 것은 나성(羅城)이라 부른다.

지형적인 조건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여러 가지 모양의 성곽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산지가 많아 특히 산성(山城)이 발달하였으며, 네모꼴보다는 자연적인 포곡선(包谷線)을 형성하여 부정원형(不整圓形)이 많다. 옛말에 성(城)을 ‘잣’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성이 중국 계통이 아님을 알려 주는 것이다.

대체로 청동기시대에는 신전(神殿)이 나타나게 되거나 신성구역(神聖區域)이 있게 되며, 이때 신전을 포함하여 지배자의 거주지를 둘러싼 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의 성곽은 집락(集落)의 형성과 지배자에 의한 노동력의 징발, 곧 정치집단의 발생을 전제로 하므로 국가의 기원과 연계된다. 고전적 성곽발생 이론에 따르면, 농경집단이 유목집단의 약탈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성곽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넓은 농경지를 가진 배후의 낮은 구릉 위에 쌓은 성곽들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남부 시베리아 지방에서 만주 지방에 걸치는 도피용(逃避用) 목책(Gorodisthche)과 관련지어서, 일찍부터 방어용인 산성 위주의 성곽이 많이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성곽의 종류

우리나라의 성곽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① 성곽의 형태로 보면 평면의 모양에 따라 네모꼴 · 둥근꼴 · 반달꼴 · 길다란 꼴로 구분할 수 있다.

② 성곽이 축조된 위치에 따라 평지성 · 낮은산성 · 높은산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③ 성곽을 축조한 목적과 기능에 따라서는 왕궁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도성(都城), 지방의 행정 · 경제 · 군사의 중심지인 읍성(邑城), 유사시에 대비하여 방어용 · 도피용으로 쌓은 산성(山城), 창고를 보호하기 위한 창성(倉城), 군사적 요충지에 쌓고 군인이 주둔하던 진보(鎭堡), 왕이 행차할 때 일시 머물기 위한 행재성(行在城), 국경과 요새지에 쌓은 행성(行城, 일명 長城) 등으로 나눌 수 있다.

④ 축조에 사용된 재료에 따라서는 주1 · 주2 · 주3 · 주4 · 주5 · 주6 · 주7 등이 있다.

성곽은 성벽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시설을 포함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성곽의 성벽과 부속시설로는 주8이 있고 성문(城門)과 여장(女墻) 그리고 타첩(垛堞) · 옹성(壅城 혹은 甕城) · 곡성(曲城) · 치성(雉城) · 성우(城隅) · 암문(暗門) · 수구문(水口門) 등이 있다.

성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서 주9 · 주10 · 주11 · 사각문(四角門) 등이 있다. 보통 성문의 보호를 위하여 옹성이 성문의 바깥에 시설되는데, 옹성도 반원형 · 사각형 · L자형 등의 종류가 있다.

성벽의 윗부분에는 몸이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감추고 주12을 통하여 외부의 적을 쏘는 시설로 여장이 있다. 여장은 타첩이라고도 하며, 평여장(平女墻) · 볼록여장[凸女墻] · 오목여장[凹女墻] 등의 종류가 있다. 성벽에 바싹 다가붙은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로는 곡성과 치성, 그리고 성우(城隅)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성벽보다 바깥으로 내어 쌓은 것으로 네 모퉁이는 성우(서양 성곽의 redan에 해당)라 하고, 바깥으로 돌출한 모양이 반원형이면 곡성, 네모꼴이면 치성이라고 하는데, 망루(서양 성곽의 rampart)처럼 먼 곳을 관측할 수 있는 시설일 뿐만 아니라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사각(斜角)으로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때 적이 치성이나 곡성에 바싹 다가붙을 때를 대비하여 따로 현안(懸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는 성벽에서 아래가 내려다보이도록 주13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이밖에도 상황이 불리하여 몰래 성을 빠져나가거나, 적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곳에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가 적을 뒤로부터 공격하는 암문(暗門)이 시설되기도 한다.

성곽의 특징

형태상의 성곽 특징

우리나라의 성곽은 평면구성이 중국의 방형(方形)이나 중세 서양의 별모양[星形]과 같이 일정한 형태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복잡한 평면을 이룬다. 따라서 성곽은 여러 개의 계곡을 둘러싸고 설치되기도 하고 산등성이의 구불거리는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지형이 산지가 많으므로 이 산지를 그대로 이용하며, 축성에 필요한 각종 재료도 부근의 산돌을 깨어 이용하거나, 돌이 없는 산은 흙을 깎아 성벽을 구성하였다. 한편, 적의 침입 때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전통적인 전술 때문에 따로 부대시설을 갖추지 않고 적당한 지형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옹성 · 치성 · 망루 등의 시설을 따로 축조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축조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축성기술상의 성곽 특징

우리나라의 성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축성 재료는 돌이다. 중국의 성이 주로 판축의 토성으로 축조되었다면 우리 나라의 성은 주로 내탁(內托)의 석성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자연할석의 평평한 한쪽 면을 성벽의 바깥부분으로 맞대어 쌓고, 그 안쪽에 석재를 뗄 때 생긴 부스러기를 넣으며, 다시 그 안쪽에 흙과 잡석을 채우는 내탁의 방법은 작업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이는 성을 부수는 무기인 충차(衝車)가 산의 험한 지형을 올라오기 어려운 점을 충분히 이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산성의 축성 기술은 산비탈을 적절히 이용하되 자연적인 경사면을 더욱 경사지게 하여 성벽으로 이용하는 삭토법이 발전하였다.

위치 선정 및 배치상의 성곽 특징

우리나라의 성들은 평지의 경우에는 물을 이용한 천연의 저지선을 만들었고, 산성의 경우는 주14을 피하여 위에서 공격을 못하도록 위치 선정을 하고 있다. 평지성의 경우는 대개 앞에는 물이 좌우에서 합쳐져 자연적 참호를 이루게 하고, 뒤에는 험준한 산에 의지하도록 하여 방어력을 자연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위치 선정은 사람의 힘을 가장 덜 들이고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점에서 지형의 유리함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특징을 보인다.

대개 물을 이용한 천연 장벽을 가진 평지성은 배후의 산에 산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성곽의 배치 상태는 이른바 주15의 형태를 이루는데, 이것이 더욱 큰 규모의 지역에 적용되면 산성들 사이에 기각지세(掎角之勢)가 이루어진다. 우리 나라 산성의 대부분은 이 기각지세에 해당하여 하나의 단위 성곽이 적의 공격 목표가 되면, 다른 성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구조적 특징

우리나라 성곽의 구조상 특징은 부대시설을 배치하는 데 산의 능선을 최대로 활용한 점이다. 우선 수문과 성문을 계곡의 중앙과 그 좌우에 설치하여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으며, S자형으로 굽이 드나들도록 하고 있다. 그 반대로 암문은 산등성이로 통하는 능선부의 바로 아래 비탈진 부분을 이용하여 설치되어 있다. 치성은 산성의 경우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성벽이 곧게 뻗은 곳에서 산등성이 쪽에 배치되었으며 대부분 곡성을 이룬다.

옹성은 가파른 계곡 경사면일 경우 대부분 곡성으로 대치되며, 대지일 경우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망루는 가장 높은 정상부, 혹은 산등성이와 연결되는 각부(角部)에 위치한다. 성내의 가장 낮은 부분에 연못이나 샘이 있으며, 대부분의 연못은 방형(方形) 혹은 원형으로 단을 두고 깊게 축조하여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고 있다. 여장은 평사(平射)보다는 내려다보고 쏘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 높지 않다.

성곽의 역사

제1기(서기전 5세기∼4세기)의 성곽

성읍국가(城邑國家)의 발생에서 고대 전제왕권이 확립되는 시기로, 북쪽 지역에 성이 축조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남쪽 지역에도 성이 축조되고 고구려식 산성입보(山城入保)가 남쪽까지 영향을 끼치며, 우리나라의 특징적인 산성이 성립되어 고유한 성격을 나타내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성들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왕검성(王儉城)은 기록상 가장 앞서는 것으로서 서기전 5, 4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만주 지역과 한반도 서북 지역에 중국과는 다른 형식의 한국식 성곽이 축조되었음을 보여 준다. 기록에 보이는 부여의 성은 중국인의 안목에서 “모두 둥그렇게 쌓아 마치 감옥과 같다.”고 하였고, 왕검성은 “매우 험하고 견고하다.”고 하였다.

중국의 성들이 네모진 것에 비하여 우리 나라의 성곽은 이 같은 특징을 가지면서 축조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가 중국의 은(殷) · 주(周) 청동기문화와는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가진 북방계(北方系)인 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에 따르는 험고한 성은 자연히 산성의 발달에 기본을 형성한 것으로 다음 단계의 고구려의 성과 맥락을 같이한다. 고구려의 성에 대해서 중국인이 말하듯이, 왕은 평시에 평지에 살지만, 위급하면 평상시 비축된 양식과 무기가 있는 산성에 들어갔다는 것이 이 시기의 양상이었다.

이 점은 우리 역사상 그 맥락이 이어졌던 점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성은 양산조개더미[梁山貝塚] · 마산성산조개더미[馬山城山貝塚] · 경주월성(慶州月城) · 대구달성(大邱達城) 등과 같이 넓은 평야와 천류(川流)를 낀 구릉 위에 축조되었으며 지형 조건에 맞도록 구성되었다. 청동기시대 이래의 주거지의 입지 조건과 같은 위치인 것이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형식은 이러한 구릉 위가 아니라 천류(川流)를 낀 평지에 방형에 가깝거나 방형으로 축조된 것이다. 이것들은 한군현(漢郡縣)의 영향으로 추측되는데 낙랑군(樂浪郡)의 치소(治所)였다고 생각되는 대동강 남안(南岸)의 구두진(狗頭津) 토성리 토성, 대방군(帶方郡)의 치소였다고 생각되는 당토성(唐土城), 임진강 남안의 육계토성(六溪土城), 서울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 · 몽촌토성(夢村土城), 청주 정북리토성(井北里土城) 등이 있다.

구릉 위에서는 높은 성벽이나 누대가 없이도 평야 지대를 내려다볼 수 있고 축성에 소요되는 공력도 덜 수 있는 데 반하여, 평지의 경우는 높은 망루와 축성에 따르는 많은 노동력과 배수 처리문제 등 기술적인 여건이 요구되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방어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 고지대의 성이어서인지 평지의 성은 차츰 더 이상 축조되지 않은 듯하다.

구릉 위의 성은 방어면에서 더욱 발전하여 산 위로 올라가게 되었고, 평소의 정치 · 경제 · 문화 활동과 특히 교통상의 여건으로 말미암아 평지나 낮은 구릉을 포용하였다. 고구려식이라는 평지성과 산성은 이미 서력 기원 이전에 성립된 것이며, 남쪽 지역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백제위례성(慰禮城)이나 한성(漢城)에 대한 한산성(漢山城), 신라의 월성이나 금성(金城)에 대한 명활산성(明活山城)이 그것으로 대략 3∼4세기까지는 이러한 산성입보(山城入保)가 한국의 전형적인 성곽제(城郭制)로 정착된 듯하다.

제2기(5세기∼13세기)의 성곽

4, 5세기에 고대 전제왕권국가의 성립에서 도성제(都城制)가 생겨나고, 이것이 통일신라에 들어와서는 지방의 중요 도시에 응용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고대 왕도제(王都制)의 성립에서 몽고의 침입 이후 고려화포(火砲)의 전래에 따른 축성물의 변화에 이르는 기간을 편의상 제2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가 우리 나라에 있어서 성곽의 발생, 산성제의 발전과 정착기라면, 제2기는 도성제의 발전과 기각(掎角) 방어체제로서 산성 · 장성 등의 발전 정착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도성제는 국내성(國內城)환도성(丸都城)에서 볼 수 있는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형이 평양에서도 나타나, 평지성인 전(傳) 안학궁지, 또는 청암리토성대성산성(大城山城)의 관계로 이어진다. 그 뒤 장수왕대에 이르러 평양성은 내 · 외성의 이중성으로 바뀌게 되었다. 도성(都城)의 내 · 외성제는 백제에도 나타나 한성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면서 웅진성도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다.

이 제도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나 그 다음의 사비기(泗沘期)는 확실히 내성[扶蘇山城]나성[扶餘羅城]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기에다가 청산성(靑山城)청마산성(靑馬山城)과 같이 왕도를 보완하는 여러 개의 성이 있어서 왕도의 방어력에 커다란 진전을 보게 된다.

신라의 경우에는 약간 변형되기는 하였으나 그 기본적 구상은 비슷하였다. 월성이나 금성이 왕이 머무는 내성이라면, 명활산성 · 남산성 · 선도산성 등은 나성의 구실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외성 관계는 지방에까지도 파급된 듯하다.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엽까지는 산성이 이중으로 되어 처음에는 산꼭대기나 산허리를 두른 산성이 바깥으로 연장되어 산의 아랫부분 혹은 거의 평지까지 에워싸는 포곡식 산성이 증가하거나, 아예 산꼭대기 부근의 내곽(內郭)과 산 아래까지 포함하는 외곽(外郭)을 가지는 성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도성제의 기본적인 내외성제와 산성의 변화는 7세기 말과 8세기에 이르러 오소경(五小京)이 설치됨에 따라 지방도시의 축성에도 응용되었을 것이다. 특히 오소경이었던 곳의 성곽 배치를 보면 그러하다. 먼저 중원경(中原京)의 경우, 현재의 충주시 중심부의 입지 조건이 북으로 남한강을 두르고 서로 달천(達川)을 낀 데다가 동쪽과 남쪽이 산악으로 막힌 널따란 평야에 있다.

서원경(西原京)이던 청주도 북과 서는 천류로 싸이고, 동과 남쪽은 산지로 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에다 충주의 경우 탄금대토성과 충주읍성(忠州邑城)이 평지에 있고 충주산성(忠州山城, 일명 南山城)이나 대림산성(大林山城)과 같은 커다란 산성이 그 배후에 짝하여 있다. 청주도 정북리토성이나 청주읍성(淸州邑城)의 배후에 우암산성(牛巖山城)과 상당산성(上黨山城)과 같은 대규모의 산성이 짝하여 있는 것이다.

낮은 구릉상의 읍성과 그 배후의 비교적 높은 산성이 짝하는 지방도시의 축성 구조는 물론 각 지방에서 일어난 초기 성읍국가적 영향이겠으나, 고구려식 산성입보의 방법이 남으로 확대되고 도읍의 기본적인 구성이 이루어진 다음 지방도시까지 거의 비슷한 계획하에 이루어졌음을 문헌과 실제적인 조사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축성 계획은 평지성과 산성과의 기각방어 계획으로서, 이것은 산성과 산성이 산꼭대기를 이어가며 축성된 배치 관계에서도 나타나 30∼40리 거리를 조망할 수 있는 산성들이 몇 개씩 떼를 지어 지방마다 존재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우선 도성인 개경(開京)의 그리 높지 않은 산허리에 왕성이 있었는데, 거란의 침입 뒤에 둘레를 자연적인 지형을 따라 쌓은 나성이 생겨나게 된다. 고려의 도성도 결국은 삼국의 왕도들이 가졌던 기본적인 축성 구조와 비슷하고, 조선시대의 한양 도성도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전통적인 축성 구조의 연장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토성 · 읍성 · 산성 이외에 이 시기에는 장성이 쌓여지고 있다.

장성 축조의 첫 기록으로는 백제가 북방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청목령(靑木嶺)에서 서해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는 것이 있다. 그 뒤 고구려의 천리장성, 신라의 패강장성(浿江長城) · 동북장성 · 관문성(關門城) 등이 축조되고, 고려에서는 다시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 말까지의 장성은 국경 근처의 여러 진보(鎭堡) 사이를 연결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전통은 세종 때의 압록강두만강 방면의 행성 축조로 이어진다.

이러한 장성의 전통도 역시 후대에까지 이어지지만 이른바 관성(關城)의 축조로 변화되어 요새지의 일부만 축성하는 것으로 그친다. 이 시기에서 특이한 축성은 발해의 도성이다. 즉, 반도 내와는 달리 중국식의 평지방형을 기본형으로 하는 도성을 축조한 것을 들 수 있다. 내성과 외성이 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내성과 외성의 남문을 연결하는 주작대로(朱雀大路, 혹은 南北大路)를 중심으로 대략 좌우가 대칭되는 구조를 가진다.

제3기(14세기∼17세기)의 성곽

이 시기는 화약과 화포의 사용으로 축성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면서 연해안과 북쪽 변경 등 외민족의 침입이 잦던 지역에 집중적인 축성이 이루어진 고려 말 · 조선 초기 이후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이다. 이 시기의 축성은 먼저 연해 지방의 읍성 축조, 북쪽 경계의 신개척지에 대한 방어선 정비와 행성 및 진보의 축조, 연해지방 진보축성과 같은 3가지 커다란 국가적 축성 사업이 진행된다.

고려 말 대륙 방면에서의 외침으로 극도로 피폐한 많은 주민들은 다시 왜구의 침입으로 곤란을 겪었다. 특히 왜구의 침입은 연해 지방을 공지화(空地化)하게 하여 개경이 위태로울 정도였다. 고려는 응급책으로 내지의 옛 성터로 백성을 피난시키고 개경에 내성을 쌓는 등의 조처를 취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해안의 읍성을 수축하였다.

조선왕조의 개창으로 한양 도성이 일차적으로 축조되고 동북면 지역의 영토 개척과 서북면 지역의 방어를 위한 진보 축성에 이은 행성의 축조가 진행되면서, 한편으로는 하삼도(下三道)의 연해 읍성 축조도 병행하는 등 축성이 계속되었다. 특히 세종과 문종 때 매우 큰 규모로 전국에 걸쳐 축성이 행하여졌다.

이러한 국방의 목적을 위한 축성 이외에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사행로(使行路)와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왜사로(倭使路)에 있는 지방도시는 외관상의 이유로 성의 수 · 개축(修改築)이 계속되었다. 화약병기가 소개되면서 산성의 비중뿐만 아니라 읍성의 비중이 커지고, 평지에 가까운 낮은 지대의 축성으로 빚어지는 방어의 능률 저하를 막기 위하여 세종 때에는 부속시설로서 옹성 · 해자 · 적대(敵臺)가 의무화되기도 하였다.

성종 때에는 연해 지방의 진보마다 군량과 병기를 둘 성보(城堡)가 축조되었고, 해안방어계획도 일단 상륙한 외적을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삼포왜란(三浦倭亂)과 같은 작은 규모의 적에게는 효과가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의 외적 상륙에는 무력하였다. 임진왜란에서 방어에 성공한 성이라고는 진주성과 몇몇의 산성들뿐이었다. 이러한 결과를 분석하면서 우리나라의 축성은 일대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4기(17세기∼19세기)의 성곽

임진왜란은 우리 나라와 명(明)과 왜의 세 민족이 치른 전쟁이었다. 세 나라 성의 비교 결과 중국식의 성과 왜식의 성에도 우수한 점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축성 방법도 반성하게 되었다.

중국의 평지 네모꼴 성은 직선 성벽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성밖의 깊은 참호와 현안 · 치성 · 여장 등 부대시설과 성벽 자체의 견고함이 우수하였다. 또한, 석축이나 벽돌로 안팎을 똑같이 채워 쌓은 겹축성벽, 성벽의 규형(圭形) 단면, 각종 화포를 설비하는 시설과 현안(懸眼)시설 등이 뛰어났다.

왜식 성의 경우, 지형은 고립된 산과 구릉을 이용하고, 벽을 겹겹이 쌓되 물매를 많이 두는 방법 등이 지적되었다. 축성의 재료도 벽돌이 응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축성에 이용한 각종 기구가 새로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반성과 종합이 이루어진 위에 나타난 것이 수원성(水原城)이라고 할 수 있다. 수원성은 조선 후기 축성 기법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새로운 성곽 축조였다.

성곽 연구 현황과 전망

20세기 이전에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성곽이 연구되었다. 고려 말기에 품자갱(品字坑)의 시설이 방어력 향상에 도움될 것으로 고안되었으나 실시되지 못하였다. 조선 세종 때에는 현문(懸門)의 제도가 연구되어 의주성에 응용된 바 있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는 각종 방탄(防灘) 방법과 양마장(羊馬墻)이 유성룡(柳成龍)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17, 18세기의 전반적 학술 발전에 따라 축성의 성벽 재료로서 벽돌이, 부대시설로서 옹성과 여장 등이 연구, 주장되었고, 새로이 중국과 일본의 축성 방법이 참작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정약용(丁若鏞)은 민보(民堡)의 축조와 함께 축성에 이용할 각종 기계를 연구하여 수원성 축조에 응용하였다. 이후 19세기 말에는 신관호(申觀浩)의 『민보집설(民堡輯說)』에서 거의 완성된 체계를 갖춘 지침이 마련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성곽의 효용이 줄어들면서부터는 역사적 산물로서의 연구와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발달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을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초기의 이와 같은 연구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일본인들의 연구는 한국에 특징적으로 존재하는 산성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어 국가의 초기적 단계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비슷한 것으로 파악하려고 하였던 의도도 엿보인다.

그 뒤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 · 세키노(關野貞) · 이케우치(池內宏) 등은 실제로 답사한 지식을 배경으로 보고서를 냈다. 8 · 15광복 이전의 연구 성과는 주로 일본인들이 이룩한 것이었는데, 경주의 일부 성곽들과 부여 · 공주를 중심으로 한 일부의 성곽들, 서울 지방의 초기 백제시대 도읍지에 대한 고찰의 일환으로서의 연구, 개경의 성곽, 그리고 고구려의 평양성 부근과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등과 발해의 오경(五京), 고려의 천리장성 조사 등이었다. 즉 고대 전제왕권국가들의 도읍지를 중심으로 한 도성과 산성의 연구가 위주였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이병도(李丙燾)가 처음으로 근대적 시각에서 연구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성곽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하고, 성곽의 분류, 삼국의 도성과 산성 발달 등에 대하여 폭넓게 개설적으로 연구한 데 이어, 「서경(西京)의 재성(在城)과 나성(羅城)」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이 방면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우리나라의 성곽 연구가 본궤도에 오른 것은 1960년대 말부터이다. 각 지방의 산성들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가 진행되어 홍사준(洪思俊) · 성주탁(成周鐸) · 정영호(鄭永鎬) 등에 의하여 문헌자료가 적은 백제사의 공백을 성곽 연구를 통하여 보충하려는 연구가 나타났고, 고대의 성곽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부각시키게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를 대상으로 송병기(宋炳基) · 차용걸(車勇杰) 등에 의하여 고대의 성지뿐 아니라 전시대에 걸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시기별 연구 성과는 반영환(潘永換)의 『한국의 성곽』으로 일단 정리되었으며, 이어 이원근(李元根)이 『삼국시대성곽연구(三國時代城郭硏究)』를 펴냈다.

현재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백제 지역의 성지 조사와, 충북대학교의 삼년산성 · 상당산성 등에 대한 정밀조사와 발굴, 문화재연구소에 의한 양주산성 · 경주월성 등에 대한 발굴조사, 공주대학교에 의한 공산성 조사, 전북대학교에 의한 익산지방 산성의 조사, 전주시립박물관에 의한 전라도 지역 성지 조사 등이 시행되고 있다.

또한 북한일본의 성곽 연구 결과를 비교하며 성곽의 기원과 발생, 성읍국가의 구조와 성격, 축성술의 발전 과정, 관방사상과 각종 공격 · 방어시설의 발전 과정, 성곽의 위치 선정과 배치 관계 등이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는 부여 부여산성 · 양주산성의 발굴을 시작으로 마산 성산 · 공주 공산성 · 익산 오금산성 · 천원 목천토성 · 양산 순지리토성(蓴池里土城) · 서울 몽촌토성 · 진해 구산성(龜山城) · 직산 사산성(蛇山城) · 충주 남산성 등이 발굴을 끝냈거나 연차계획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정밀한 축성 기법과 종류별 체계적인 이해에 접근하고 있어, 특히 고대사 문헌사료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연구분야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전반적으로는 부소산성 · 이성산성(二聖山城)과 같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한꺼번에 드러났듯이, 장기적인 계획 아래 진행되는 연차별 조사가 이 방면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일본에 있는 고대산성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조사하고 있는데, 삼국시대 축성술이 직접 일본에 끼친 영향을 추적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자료의 교환과 공동 연구가 차츰 활발해짐으로써 객관적인 공통 학설이 점차 정립되어 가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지(三國志)』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성제고(城制考)』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민보집설(民堡輯說)』(신관호)
『朝鮮古蹟調査報告』(1916∼1922)
『고려시대의 연구』(이병도, 을유문화사, 1948)
『경남의 왜성지(倭城址)』(부산대학교 한일문화연구소, 1961)
「세종조양계행성축조(世宗朝兩界行城築造)에 대하여」(송병기, 『사학연구』 8, 1964)
「류성룡의 군사관의 일반-그의 산성관(山城觀)-」(정하명, 『육사론문집』 4, 1966)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김원룡, 『서울대학교고고인류학총간』 3, 1967)
「대전부근고대성지고」(성주탁, 동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4)
「한국성곽의 사적고찰(史的考察)」(차용걸, 충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5)
「세종조하삼도연해읍성축조(世宗朝下三道沿海邑城築造)에 대하여」(차용걸, 『史學硏究』 27, 1978)
『한국의 성곽』(반영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조선성종대해방축조논의(朝鮮成宗代海防築造論議)와 그 양상」(차용걸, 『백산학보』 22, 1979)
「삼국시대성곽연구」(이원근, 단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0)
『상당산성지표조사보고서』(충북대학교박물관, 1982)
『공산성』(공주사범대학 백제문화연구소, 1982)
『삼년산성-추정연못지 및 수구지발굴조사보고-』(차용걸, 충북대학교박물관, 1983)
『양산순지리토성(梁山蓴池里土城)』(동아대학교박물관, 1983)
『진해구산성지(鎭海龜山城址)』(동아대학교박물관, 1984)
『전국읍성조사』(문화재관리국, 1984)
『정비복원을 위한 몽촌토성발굴조사보고서』(몽촌토성발굴조사단, 1984)
『목천토성(木川土城)』(윤무병, 1984)
『충주산성 종합지표조사보고서』(충주시, 1984)
『익산오금산성발굴조사보고서』(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85)
「직산사산성발굴조사중간보고」(성주탁·차용걸, 『백제연구』 16,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85)
『금오산성기초조사보고서』(윤용진, 경북대학교고고인류학과 구미시, 1985)
『몽촌토성발굴조사보고』(몽촌토성발굴조사단, 1985)
『경기도백제문화유적』(한양대학교박물관, 1986)
『남한산성지표조사보고서』(한양대학교박물관, 1986)
『한국성곽의 연구』(손영식, 문화재관리국, 1987)
「고려말·조선전기대왜관방사(對倭關防史)연구」(차용걸,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朝鮮の建築と藝術』(關野貞, 岩波書店, 1941)
『北九州瀨戶內の古代山城』(小田富士雄, 1983)
주석
주1

흙으로 쌓되 판축(版築)한 것    우리말샘

주2

흙으로 쌓되 삭토(削土) 등의 방법으로 쌓은 성.

주3

돌로 쌓은 것으로 자연할석축(自然割石築)과 무사석축(武砂石築)이 있다.

주4

벽돌로 쌓은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전체를 벽돌로 쌓은 것은 없고 일부만 벽돌로 쌓았다.

주5

말뚝 따위를 죽 잇따라 박아 만든 울타리. 또는 잇따라 박은 말뚝.    우리말샘

주6

녹각성(鹿角城)이라고도 하며 목책과 달리 가지 부분까지 이용하여 세운 것.

주7

목책이나 목익(木杙)에 진흙을 발라 마치 담장처럼 만든 것.

주8

해자(垓字) 혹은 참호(塹濠) 혹은 구(溝), 해자(海子).

주9

안과 바깥이 S자 모양으로 굽어들며 들어가도록 된 문.

주10

아래위로 여닫게 되어 있는 문. 평상시에는 다리를 들어올려 성의 안팎이 통하지 못하게 하고, 필요할 때만 문을 내려 통행하는 조교(釣橋).    우리말샘

주11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우리말샘

주12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하여 성가퀴에 뚫어 놓은 구멍.    우리말샘

주13

성벽 맨 윗부분에 바깥으로 나오도록 얹은 돌

주14

성 내부를 넘겨다 볼 수 있는 산.

주15

앞뒤에서 적을 몰아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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