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 ()

목차
관련 정보
귀형화약통
귀형화약통
과학기술
개념
폭발반응을 공업용 · 군사용에 이용하는 폭발성 물질 또는 혼합물.
목차
정의
폭발반응을 공업용 · 군사용에 이용하는 폭발성 물질 또는 혼합물.
내용

학술적으로는 화약과 폭약을 총칭하여 화약류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화약류를 그대로 화약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12세기 북송시대에 전장(戰場)에서 사용되었고, 우리 나라에서 화약의 폭발력이 알려져 중요한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전반 고려 공민왕 이전으로 추측되고 있다.

고려 말에 자주 있었던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화약과 화포는 당시 최무선(崔茂宣)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발전되었다. 이에 대한 관심은 권력집중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태조와 세조에 의하여 위험시되어 억압되었으나, 태종·세종 및 문종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개발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화약의 합성에 가장 기본적인 원료인 염초(焰硝)의 제조법은 비밀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개발하지 못하였고, 국가에서도 계속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최무선이 저술한 ≪화약수련법 火藥修鍊法≫과 15세기 전반의 ≪총통등록 銃筒謄錄≫은 남아 있지 않다.

16세기 전반의 ≪신전자취염초방 新傳煮取焰硝方≫과 16세기 말의 ≪신전자초방 新傳煮硝方≫에 저술된 자취기술들은 전대의 지식이 축적되어 진전된 기술이기보다는 각 개인의 어려운 노력 끝에 얻어진 방법들이다. 고려 때에는 화약의 제법을 알지 못하고 1373년(공민왕 22)에 명나라에 화약을 청하였다. 그래서 다음해 5월에 명나라 태조는 염초 50만 근, 유황 10만 근과 그 밖에 필요한 약품을 주었다.

고려에서 최초로 화약을 제조하는 데 성공한 이는 최무선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노력한 끝에 중국사람 이원(李元)으로부터 염초를 흙에서 추출하는 방법을 배우고, 마침내 1377년(우왕 3)에는 국가의 화약제조소로서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였다. 일설에는 최무선이 직접 원나라에 가서 배워왔다고도 한다.

화약과 여러 가지 화기의 제조는 화통도감의 발족과 함께 활발해지고 1378년에는 화기발사의 전문부대로서 화통방사군(火㷁放射軍)이 편성되었다. 이렇게 발달한 화약병기는 고려 말 30년간의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하였으나, 화통도감이 설치된 지 10여년 만인 1389년에 군기시(軍器寺)에 합속되었다.

또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수립되면서 이성계(李成桂)는 권력집중을 위한 수단으로서 화기발달에 매우 소극적이어서 화약은 정월 설놀이의 하나였던 불꽃놀이[火戱]에만 쓰였을 정도였다. 태조와는 달리 태종은 왕위에 오른 첫해에 최해산(崔海山)을 등용하여 조선 화기발달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1404년(태종 4)경에는 군기감별군(軍器監別軍)이 편성되고 화통군(火㷁軍)이 증원되었으며, 1407년에는 화약장(火藥匠) 33명이 군기감에서 화약을 제조하였다. 1415년에는 화약감조청이 완공되었으며, 국초의 화약보유량이 6근 4냥에 불과하던 것이 1417년경에는 6,900여 근으로 증가하였다. 세종 때에 이르러 서북변경의 개척이 적극화되면서 화약의 연소비량이 약 8,000근이나 되었다.

이 중 약 3,000근은 지방에서 생산하였는데, 감독관을 파견하여 엄중히 관리하게 하였다. 평안도·황해도·강원도의 상삼도(上三道)에서는 염초를 점차 상공(常貢)으로 바치게 하였으나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하삼도(下三道)에서는 계속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의 감독하에 해안에서 먼 곳을 골라서 추출하게 하였다.

지방에서의 생산을 확대하지 못하고 해안지방을 피한 것은 화약의 자취기술이 혹시 왜인에게 전습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약의 부족함 때문에 화포의 발사훈련도 제한되었고, 1433년(세종 15)부터는 불꽃놀이에 쓰는 염초량을 종전의 1,000근에서 30근으로 대폭 감축시켰다. 1445년에는 대궐내 내사복사(內司僕司) 남쪽편에 비밀리에 사표국(司0x9C80局)을 설치하여 염초를 달이게 하였다.

사표국의 설치는 세종보다도 문종의 뜻에서 창안된 것이었기 때문에 문종 때에는 더욱 성하였으나 1455년(단종 3)에 폐지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문종은 화약의 필요성과 그 제조를 위한 염초자취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여 전국에 25개의 도회소를 설치하였다. 이 도회소들에서 나라의 인가를 받은 사람만이 염초를 제조하여 전량을 국가에 바쳐 그 비밀이 왜구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도회소가 설치되어 화약제조를 장려하니 과잉생산이 우려되었다. 계속되는 과잉생산을 막기 위하여 1451년(문종 1)에는 각도에서 생산할 염초의 양을 정하였으며, 1452년에는 각 관(官)에 근량(斤兩)을 정하여 상공으로 상납하도록 결정하였다.

조선 초기에 태종·세종·문종대를 거치면서 화기와 화약의 제조기술은 발전을 거듭하여 대량생산이 국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화약의 정확한 제조기술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동의보감≫에는 ≪의학입문 醫學入門≫에 인용한 염초의 제법이 있는데, ≪천공개물 天工開物≫에 나오는 흙의 자연표면을 정화시키는 단순한 방법과 같다.

16세기에서 17세기 초 사이에 화약제조공정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으며, 이 방법들은 현존하고 있는 1635년(인조 13)에 저술된 이서(李曙)의 ≪신전자취염초방≫과 1698년에 이루어진 ≪신전자초방≫에서 볼 수 있다. ≪신전자취염초방≫은 성근(成根)이 중국에서 배우고 스스로 연구하여 완성한 화약제조방법을 이서가 편찬하여 국문으로 번역, 간행한 책이다.

성근의 염초 달이는 과정은 적당한 종류의 흙을 모으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오래된 집안의 부엌 부뚜막, 마루 아래, 담벼락 아래와 온돌 밑의 흙을 가볍게 가만가만 위만 긁어 취한다. 혀로 핥아 그 맛을 보면 짜고[鹹], 시고[酸], 달고[甘], 또는 매운[辛] 것이 좋다. 이러한 흙에 가마솥 아래에 있는 여러 종류의 재[灰]와 사람의 소변[人尿]을 잘 섞어서 한곳에 높이 쌓아두고 비를 맞지 않게 한다.

얼마 뒤에 말똥을 말려서 쌓아놓은 흙 위에 덮고, 불로 태워서 불기가 속으로 들어가게 하면 습하고 더운 김에 의하여 띄워져 흰 이끼가 생긴다. 이렇게 하여 4, 5개월 후에 쓰는데, 오래 두면 둘수록 좋다. 이렇게 혼합된 원료에서 입부리가 달린 나무통[木槽]들을 사용하여 사수(篩水)하여 필요한 성분을 추출해내어 세 번 끓여 식혀서 초석을 결정시킨다.

이 방법의 효율을 살펴보면, 3일간 초련하여 약 180근을 얻고, 이것을 정련(正煉)하면 약 95근 정도의 염초가 된다. 한달이면 약 1,000근의 정제된 염초를 얻는데, 필요한 인력은 장인(匠人) 3명과 잡역군(雜役軍) 7명이면 충분하다. 여기에 필요한 준비물을 책 끝에 기록하면서, 없으면 단 하나의 가마솥과 하나의 나무통으로라도 염초를 달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일을 하다가 정지하게 되면 쓰고 남은 본수와 같은 원료들을 몇 년이라도 땅에 묻어두었다가 다시 쓰면 좋다고 하였다. 섞인 함토(鹹土)에서 필요한 성분을 추출해내고 남은 찌꺼기흙을 다시 오줌과 말똥과 잡회와 섞고 새로운 찰흙[赤粘]과 같이 버무려 짓이겨서 벽돌이나 담으로 쌓아 비를 맞지 않게 하고 3년을 기다려서 사용하면 새로 캔 흙보다 품질이 더 좋다.

≪신전자초방≫은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숙종 때 북경에서 배워와서 연구한 화약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기록하고 그 방법을 얻기까지의 유래를 자세하게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은 1698년(숙종 24)에 간행되었으며 1796년(정조 20)에 중간되었다. 10조로 나누어 설명된 방법은 각 조마다 국문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화약 달이는 방법은 대체로 종전의 방법들과 비슷하나 몇 가지의 중요한 새로운 과정을 밝힘으로써 효율을 높이고 성능을 좋게 하였다. 먼저 흙을 모으고[取土], 재를 받아서[取灰], 같은 부피의 비율로 섞는다[交合]. 섞은 원료를 항아리 안에 펴고 물을 위에 부어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篩水] 가마에 넣고 달인다[熬水).

이 물을 식혀서 모초(毛硝)를 얻고, 이 모초를 물에 녹여 다시 달여서(再煉) 정제시킨다. 재련 후에도 완전히 정제되지 않았으면 또 한 번 달인다(三煉). 이렇게 얻은 정초(精硝)를 버드나무재[柳灰]와 유황(硫黃)가루와 섞어서 맑은 쌀뜨물로 반죽하여 방아[碓搗]에 넣고 찧는다(合製).

취토·취회·교합·사수·오수·재련·삼련·합제의 여덟 가지 공정단계와 물 달이고 재를 만들기 위하여 쓰는 풀 매는 작업[刈草]과 재련 때에 쓰는 아교물[膠水]에 대한 항목들이 이 책의 본문을 이루고 있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얻은 염초는 품질과 효력이 좋아서 땅굴에 묻어두면 10년 장마를 지내도 습해지지 않는다.

정초 1근에 버드나무재 3냥과 유황가루 1냥 3전(錢)을 섞어서 화약으로 만든다. 이 합제방법은 흑색화약을 제조하는 방법이며, 원료들의 비율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질산칼륨 40∼80, 황 3∼30, 목회 10∼40의 배합범위에 들어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시대에 발전된 화기와 화약은 왜구의 침략을 방지하고 국방을 지키는 데 지대한 구실을 하였다.

그 기술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되었으며, 왜인은 우리 나라에서 화약병기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마침내 명종 말년 경에는 왜인들이 이 기술을 습득하게 되면서 외국 사신들에게 보여주는 불꽃놀이를 감축하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 산업폭약의 최대용도는 발파용이다. 터널을 판다든지 광물자원을 갱내에서 채굴한다든지 지하발전소의 건설 등에 이용된다. 그리고 항만·해협·하천·호수 중에서 암초 등의 장애물을 제거한다든지, 최근에는 건물이나 교량을 해체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군사용으로는 총포용 발사약으로 사용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로켓추진용의 고성능 특수화약이 제조되고 있다.

또, 물건을 절단한다든지, 구멍을 뚫는다든지, 압력을 이용한 용접을 한다든지 하는 것도 화약의 힘에 의지하고 있다. 그 밖에 화약을 사용한 제품으로서는 불꽃·발광제제품(發光劑製品:조명탄·색광제제품)·성냥 등이 있다. 화약은 염료공업·의약품공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하여 이들 화학공업에서 염료·안료·의약품 등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기업이 늘고 있는 현상이다.

참고문헌

『동의보감(東醫寶鑑)』
『신전자취염초방언해(新傳煮取焰硝方諺解)』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
『화약학·발파학(火藥學·發破學)』(김영달외, 문운당, 1971)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5)
『조선시대화약병기사연구(火藥兵器史硏究)』(허선도, 일조각, 1994)
「여말선초 화기(火器)의 전래와 발달」 상·중·하(허선도, 『역사학보』 24·25·26, 1964·1965)
「이조중기 화기(火器)의 발달」 상·하(허선도, 『역사학보』 30·31, 1966)
관련 미디어 (4)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