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신라남산신성’이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에 자리한 남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쌓은 석성(石城)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91년(진평왕 13)에 남산성을 쌓으니 주위 2,854보(步)였다고 하였고, 663년(문무왕 3)에는 남산신성에 장창(長倉)을 건립했다고 한다. 1935년 이래 1994년 이르기까지 총 9개의 남산신성비가 발견되었는데, 남산신성비에는 공통적으로 "신해년 2월 26일에 남산 신성을 쌓을 때에 법과 같이 3년 안에 붕괴되어 무너지면 죄를 준다고 교시하신 일이다. 교령을 알려 맹세하게 한 일이다(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節如法 以作後三年 崩破者 罪敎事 爲聞敎令 誓事之)"라고 새겨져 있다. 결과적으로 전승 자료에 남산성과 남산신성이라는 두 개 성의 명칭이 나온다. 신해년은 남산성을 쌓은 진평왕 13년에 해당된다. 이에 이전부터 존재하던 ‘남산성’을 진평왕 13년 대대적으로 수축 내지 개축하여 면모가 일신되었으므로 ‘신성’이라 하였다거나, 현재 석성인 남산신성으로부터 약 500m 거리에 위치한 남산토성을 남산성으로 파악하여, 토축인 남산성과 석축인 남산신성은 별개의 성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성안에는 좌창(左倉) · 우창(右倉) · 중창(中倉)의 세 개의 창고가 있어 무기와 곡식을 저장해 전쟁에 대비하였다. 지금도 창고 자리에서 불에 탄 쌀이 나온다. 679년(문무왕 19) 성을 크게 수축했다고 하며, 현존 성벽은 대부분 이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성의 길이는 약 3,750m이며, 대부분 무너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을 보면 가로 50㎝, 세로 20㎝ 정도의 잘 다듬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높이는 약 2m이다. 비에는 남산성을 쌓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모여 일정한 길이의 성벽을 책임지고 쌓았으며, 만일 성벽이 3년 안에 무너지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맹세가 새겨져 있다.
남산신성비에서 각 집단이 담당한 축성 거리와 현존 신성의 거리를 대략 비교해 보면, 적어도 200여개의 집단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법흥왕대의 사실이 전해져 기록된 『양서』 신라전에 보이는 52읍륵(邑勒)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이, 6세기 초만 하더라도 지방관이 파견된 성이나 촌의 수는 52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진평왕 재위 초기인 6세기말에 이르러서 최소 200여 지역에 지방관이 파견되었음을 추론할 근거를 본 비에서 얻을 수 있다. 더불어 전국을 대상으로 동원 가능한 일률적 역역체제와 축성 후 3년 안에 담당 구역이 붕괴될 경우 단죄한다는 규정은 신라 전역을 통제할 수 있는 행정체계와 법체계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이는 법흥왕대의 율령 반포를 기반으로 함은 물론 진흥왕대 한강 유역 독점을 비롯한 가야 지역 통합 등의 확대된 영토에 대한 신라 왕실의 지배체제가 체계적으로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 곧 지방 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와 더불어 지방민에 인원 파악과 동원 조직에 일정한 체계의 성립을 본 산성의 구축을 통해 알 수 있다.
경주 평야 일대를 전체적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산성은 서쪽의 서형산성과 동쪽의 명활산성, 북쪽의 북형산성과 함께 신라의 왕경인 경주를 호위했던 산성이었다. 더불어 이 산성 축조시 세워졌던 남산신성비의 비문 내용을 통해 6세기말 신라가 전 국토에 대한 율령지배체체를 갖추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