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지는 온수군(溫水郡)의 속현(屬縣)인 아술현(牙述縣,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이다. 668년(문무왕 8)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할 때 참전하여 사천원(蛇川原)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출신지로 기록된 아술현은 660년 신라가 백제를 통합하며 신라 영토가 된 지역이다. 평양성 전투 당시 군공으로 포상 받은 지방민들은 술간(述干)이나 고간(高干)의 외위(外位)를 소지한 반면 구율은 신라 진골(眞骨)이나 6두품만이 소지할 수 있는 제8위 사찬(沙飡)의 관등을 소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신라인이며 경주에서 태어나 아술현으로 파견된 왕경인(王京人)일 개연성도 있다.
구율은 신라의 백제 통합 이후 온수군 아술현에서 관리로 근무하다가, 668년 평양성 공격을 위해 한성주(漢城州, 지금의 경기도 광주)를 거점으로 신라군이 집결할 때 동원되었던 듯하다. 당시 신라군이 한성주를 떠나 북진하여 평양성 일대의 당군(唐軍)과 연합하려하자, 고구려는 군사를 내어 평양의 남쪽 사천원에서 신라군을 막아 싸웠지만 결국 패배하였다. 신라군은 사천원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당의 대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직공(直攻)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멸망에 사천원 전투의 승리가 중요하였으므로 문무왕은 전투의 공훈자들에게 특진을 허락하고 전리품을 하사하였다. 당시 구율은 사천원 전투에서 사천의 다리 밑으로 들어가 냇물을 건너 적을 크게 물리쳐 제일의 공을 세웠다. 아마도 고구려군이 장악하고 있던 사천교 아래를 헤엄쳐 건너가 지키던 고구려 병사들을 베고 다리를 점령함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공을 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군령(軍令) 없이 임의로 적지에 들어갔기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나 군공록(軍功錄)에 오르지 못하였고, 홧김에 목매어 죽으려다가 주변 사람들의 구조로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