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탈해이사금 11년(67) “탈해가 박씨의 귀척(貴戚)에게 국내의 주(州)와 군(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이들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파사이사금 5년(84) “고타군주(古陀郡主)가 청우(靑牛)를 헌상하였다.”거나, 11년(90) “사인 10인을 나누어 보내, 주주·군주로 공사(公事)를 게을리 하여 전야를 많이 거칠게 한 자를 두루 살피어 폄출케 하였다.”는 기사 등도 보인다.
그런데 신라에서 주와 군은 505년(지증왕 6) “왕이 친히 국내 주군현(州郡縣)을 정하고 실직주(悉直州)를 두어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6세기 초에 설치되었다. 그런 까닭에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보이는 군의 명칭은 후대의 군에 상당하는 취락에 소급 추기(追記)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지증왕 6년 실직주를 두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는데, 이 군주(軍主)는 주에 파견되어 민정과 군정 업무를 총괄한 최고위 지방관으로 주 예하의 군주(郡主)와 구별된다.
군주(郡主)의 출현은 군의 설치와 연계되는데, 236년(조분이사금 7) “골벌국주 아음부(阿音夫)가 와서 항복하자 그에게 집과 논밭을 주어 안치시키고 해당 지역을 군(郡)으로 삼았다.”고 한다. 신라가 골벌국 지역에 군을 설치하였으니 이를 관리할 인물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골벌국이 자발적으로 항복하였고 그 왕을 신라 중앙 귀족에 편입시켰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신라는 옛 골벌국 지역에 설치된 군에 대해 공납의 의무와 자치권을 인정한 간접 지배를 실시했을 것이다. 이에 공물 납부를 주관하고 군에 대한 자치권을 가진 인물을 후대 군주라 일컬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신라는 중고기에 이르러 정복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를 도모하였다. 이에 중앙에서 파견된 인물이 다스리는 성과 행정촌이 곳곳에 설치되었고, 행정촌의 확대나 몇 개의 행정촌을 묶은 중간 수준의 행정구역으로 군(郡)이 설정된다.
한편 금석문 자료에 근거해, 군(郡)은 505년이 아닌 「울진봉평비」가 건립된 524년에서 「명활산성작성비」가 건립된 551년 사이에 설정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군주라는 직책은 위의 사례를 제외하고 신라본기는 물론 직관지 등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정식 관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중고기 군의 설치 이후 군의 군정(軍政)은 당주(幢主), 행정은 나두(邏頭)라는 관직으로 이원화되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최종적으로 통일기 9주 5소경제의 완비와 더불어 기본적인 지방 제도가 주군현(州郡縣)으로 구성되며, 주의 하부 행정 기구로서 군(郡)과 이의 최고 관리자로서 태수(太守)가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