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미상. 출신지는 칠중성(七重城) 부근. 미제(美齊)는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상간(上干: 外位 제6위)이라는 관직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백제부흥운동으로 신라의 서쪽 국경이 혼란스러워지자 고구려는 이 틈을 노려 660년 10월 신라 한강 북방의 요충지인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칠중성의 현령(縣令)이자 군주(軍主)인 필부(匹夫)가 20여일 이상 진심전력(盡心全力)으로 방어하니 고구려가 이를 함락시키기 어려워 퇴각하려 했다. 그런데 역신(逆臣) 대나마(大奈麻) 비삽(比歃)이 성의 곤궁함을 몰래 알려주어 11월 1일 고구려군이 바람을 이용해 화공(火攻)을 동원하는 등 총공세에 나섬으로써 성이 매우 위태로웠다. 이에 필부가 비삽의 머리를 베어 성 밖으로 내던지고 민을 독려하여 적극 항거하였다.
특히, 상간이었던 미제는 본숙(本宿), 모지(謀支) 등과 더불어 필부를 도와 힘써 싸웠지만 결국 적의 화살에 맞아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당시 미제가 상간이라는 외위(外位)를 소지한 것으로 보아 칠중성이 위치한 적성 인근 지역에서 성장한 토착집단의 장(長)으로 여겨진다. 아마 그는 진흥왕이 한강 유역의 점령했을 때 신라에 귀순하고 대대로 지방 촌주(村主) 급의 신분을 유지하다가 칠중성전투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와 필부전(匹夫傳)에는 당시 치러진 칠중성전투의 결과에 대한 내용이 없다. 그러나 671년 문무왕이 당에 보낸 답서(答書)에 “건봉(乾封) 2년(667) 신라가 고구려의 칠중성을 공격해 점령했다”는 기사가 있어 660년에 일시 함락되었다가 667년 되찾은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