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이성산성은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가 축조한 포곡식 성곽이다. 축성 기법과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6세기 중반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은 해발 209.8m의 이성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감싸고 있다. 성벽에 있는 남문터와 동문터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 구조이다. 이성산성은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한 뒤에 설치한 신주의 치소성이었다. 이후 한산주의 치소성으로 활용되면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 지방지배 체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축성 기법과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신라가 6세기 중반경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차 저수지에서 출토된 합(盒)과 짧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 등은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우 비슷하다. 황룡사는 553년부터 조성되었는데, 이 때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주의 치소는 광주 일대로 추정되는데, 그 치소성이 이성산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성벽과 저수지, 건물터 등에 축조 시기의 차이가 확연히 나타나고, 출토 유물도 시기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8세기 초반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고려 초기의 청자 조각이 약간 보일 뿐이어서, 고려 초기 이전에 산성의 기능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은 해발 209.8m의 이성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감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북쪽으로는 한강 유역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1986년~2010년에 진행된 12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성벽은 두 차례에 걸쳐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처음에 쌓은 성벽은 일정 기간이 지나서 붕괴되었는데, 그 뒤 처음 쌓은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4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다시 성벽을 쌓았다. 처음 쌓은 성벽은 생토면을 ‘ㄴ’자 형태로 깎아낸 다음 너비 7∼8m 정도로 내외협축(夾築)하여 축조하였다. 성돌은 화강편마암을 사용하였는데, 너비는 40∼50㎝이고, 두께는 15∼24㎝ 정도이며, 두께와 너비의 비율은 대략 1:2.2∼1:3 정도로 너비가 긴 네모난 모양이다. 뒷채움돌은 마름모꼴로 뾰족하게 만들어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 맞물리게 쌓았다. 생토면과 뒷채움돌 사이에는 물이 스며들지 않게 점토를 다져 넣었다.
뒤에 다시 쌓은 성벽은 점토와 잡돌을 놓아 바닥을 다진 다음 1m 정도 크기의 받침돌을 놓고서 성돌을 쌓은 모습이다. 성돌은 처음 쌓은 성벽의 성돌과 달리 질 좋은 화강암을 뿌리가 긴 4각뿔 모양으로 다듬었는데, 크기는 너비 30㎝, 두께 20㎝ 안팎이다. 성벽은 윗단을 아랫단 보다 10㎝ 정도 들여 쌓아 처음 쌓은 성벽보다 경사도가 완만한 편으로, 처음 쌓은 성벽보다 견고하고 아름답으면서 고운 편이다.
성벽에는 여러 곳의 문터가 확인되었는데, 발굴조사된 남문터와 동문터는 모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 구조로 바닥에는 배수 시설이 남아 있다. 동문터는 한 차례 고쳐 다시 만들었는데, 너비 6.2m의 크기를 3.56m로 축소하였다. 동문터 북쪽에는 치(雉)가 남아 있는데, 역시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되었다. 처음 쌓은 성벽의 치는 너비 13.2m, 길이 2.1m이고 다시 고쳐 쌓은 성벽의 치는 너비 24.5m, 길이 5.1m이다. 성벽 안쪽에서는 너비 2∼3m의 회곽도(廻郭道)도 확인되었다.
산성 안에서는 다수의 건물터도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발굴된 것만 11기이지만, 주춧돌이 노출되는 등 건물터가 확실한 것을 포함하면 최소 20기 이상의 대형 건물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건물은행정 · 의례의 기능에 맞추어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된 저수지 3곳도 확인되었다. 1차 저수지는 처음에 성벽을 쌓았을 때 타원형으로 만들었지만, 2차 저수지는 1차 저수지 안을 파낸 다음 네모나게 쌓아 만들었고 석축 바깥에는 2m 두께로 점토를 다져 물이 새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3곳의 저장 구덩이와 4곳의 의례 유구도 확인되었다. 의례 유구는 건물의 주춧돌이나 주춧돌 주변에 큰 돌을 놓고서 주변을 잔돌로 쌓은 구조로, 그 가운데 1기에서는 17마리에 해당하는 토제마(土製馬)와 철제마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산성 안의 건물은 각각 영조척(營造尺)을 달리하였다. 곧 네모난 건물터는 고구려척을 사용하였고, 다각형 건물터는 당척을 이용하였다. 이로써 보아 건물을 세울 당시에는 고구려척에서 당척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C지구 저수지에서는 길이 29.8㎝인 나무로 만든 당척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한편 문살무늬[格子文], 선조무늬[線條文], 민무늬[無文], 생선뼈무늬( 어골문(魚骨文)) 암키와와 수키와가 출토되어, 산성 안에는 위상이 높은 대형 건물이 많이 자리하였음을 알려준다.
한편 흙으로 만든 벼루 40여 점, ‘무진년(戊辰年)’, ‘남한성(南漢城)’, ‘수성(須城)’, ‘ 도사(道使)’, ‘ 촌주(村主)’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목간이 다수 출토되었다. 목간은 이성산성의 이름이 남한성이었을 가능성과 함께 축성 시기, 신라의 지방지배체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물로 알려져 있다.
화살촉과 투부(鬪斧) 등의 철제 무기류와 쇠스랑, 삽, 주조(鑄造) 괭이, 자귀, 낫 등의 농 · 공구류도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 중반 이후로 편년되는 신라 계통의 무기와 농공구들이다. 또한 대형 시루, 동이류, 자배기류, 대형 항아리나 옹 · 단지류 합(盒)과 뚜껑, 사발, 굽다리접시, 나무빗, 동물뼈 빗치개, 나무 얼레빗, 요고(腰鼓), 나무팽이, 박바가지, 나무 이남박, 칠기, 나무 인형, 나무 망치, 짚신, 버들고리, 천 조각 등 다양한 토기들과 나무 제품들도 출토되었다. 이것 역시 6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 유물로, 당시의 생활과 예술, 풍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성산성은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한 뒤에 설치한 신주의 치소성이었으며, 이후 한산주(漢山州)의 치소성으로 활용되면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 지방지배체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성벽과 저수지, 건물터 등에 여러 차례 고쳐 쌓은 흔적이 뚜렷하여 성곽 축성 방법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울러 출토 유물에도 제작 시기의 차이가 드러나 있어 당시의 생활과 예술, 의례, 풍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