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궁남지 ( )

부여 궁남지 전경
부여 궁남지 전경
건축
유적
문화재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제30대 무왕 관련 연못. 원지.
이칭
이칭
마래방죽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4년 06월 10일 지정)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내용 요약

부여 궁남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시대의 연못이다. 『삼국사기』에 의해 백제 무왕 35년(634)에 궁궐 남쪽에 만든 것이라 하여 궁남지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무왕의 어머니가 궁남지의 용과 정을 통하여 무왕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궁남지는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훼손되어 연못 주변은 농지로 이용되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우물과 몇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 궁남지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궁궐 연못이다. 조성 기록이 명확하고 백제의 조경 기술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키워드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제30대 무왕 관련 연못. 원지.
개설

백제 무왕 때에 궁궐의 남쪽에 만든 큰 연못으로, 『삼국사기』에 의해서 궁남지라고 부른다. 다만 연못이 어떤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우물과 몇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동쪽에서는 주춧돌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 건물터가 확인된다.

역사적 변천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주2을 모방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왕 39년조에는 “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하였다.

한편 『삼국유사』기이제2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南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주1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훼손되어 연못 주변은 농지로 이용되었으며, 현재 연못의 규모는 1만평도 채 안 되는 형편이다.

내용

연못은 자연 지형의 곡선을 그대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못의 가운데와 물가에는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고, 연못 주변에서는 토기와 기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연못 속의 섬이 바로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섬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동해 한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섬인 주3 · 주4 · 영주(瀛州)의 주5이 있다고 하여, 그 섬 가운데 방장선산을 본따서 신선정원(神仙庭苑)을 꾸며 불로장생을 바랐던 도교적 사상과 관념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궁남지 동쪽의 화지산(花枝山) 서쪽 기슭에는 궁남지쪽으로 향한 완만한 경사지에 대리석으로 만든 8각형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주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이곳은 사비정궁(泗沘正宮)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이궁(離宮)터로 추정된다.

따라서 궁남지는 이궁의 궁원지(宮苑池)였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궁남지는 1965년∼1967년에 연못 바닥을 준설하고, 가장자리의 언덕에 흙을 쌓고서, 수양버들을 심어 조성하였다. 전체 면적은 13,000평 정도이지만, 발굴조사 결과 원래 규모는 이보다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1990년~1993년, 1995년에 발굴조사가 시행되어 궁남지 내부 및 주변에서 나무 및 차지고 끈끈한 흙인 점질층으로 만들어진 집수시설, 수로, 건물터 등이 조사되었다. 집수시설은 동서 길이 11.65m, 남북 너비 3.13m인데, 가장자리를 따라 통나무를 2중으로 박아 벽체로 쌓은 모습이다.

집수시설과 가까운 동쪽 바깥쪽에는 도수로가 남~북 방향으로 확인되었는데, 이곳을 거쳐 집수시설로 물을 끌어드리도록 하였다. 집수시설 안의 서쪽 부분은 6.3m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고, 동쪽 부분에는 수로에서 유입된 물을 흘러 보낼 수 있도록 얕은 ‘∪’자형 홈이 나 있다. 수로는 인공물을 설치하지 않은 자연형 수로와 옆면에 말목을 박고 나무를 횡으로 걸친 인공형 수로가 연결된 모습이다.

수로에서는 “서부후항사달사사정의활□□□정귀인중구사하구이매라성법리원수전오형(西部後巷巳達巳斯丁依活□□□丁歸人中口四下口二邁羅城法利源水田五形)”, “서부중부이(西部中部夷)”로 판독되는 백제 목간 1점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길이 35㎝로 소나무로 제작되었는데,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확인되는 영조척(營造尺)이 35.05㎝인 것과 부합하여, 백제 도량형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목간에 ‘서부후항(西部後巷)’과 ‘중구(中口)’, ‘하구(下口)’ 등의 행정구역명이 기록되어 있어, 문헌에서만 확인되었던 ‘후항’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5부와 5항을 두었다는 백제 행정체제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 외에도 수로 안에서는 여러 점의 나무 삽과 가래, 베틀의 구성품인 목제 주7, 부들로 제작된 짚신, 사람의 주6 등 당시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궁남지는 현재 알려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궁원지(宮苑池)로, 조성 기록이 명확히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조경기술과 도교문화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궁남지의 조경기술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확인되듯이 일본에 알려져 일본 원지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한다.

궁남지는 규모와 정확한 구조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동아시아 원지 조경사 연구의 표준 유적이 될 것이라 기대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궁남지』(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9)
「부여 궁남지 내부 발굴조사 개보-백제목간 출토 의의와 성과」(최맹식 외,『한국상고사학보』20, 1995)
「부여 궁남지 제2·3차 발굴조사 개보」(신광섭 외,『고고학지』5, 1993)
주석
주1

어떤 일이나 상황을 너그러이 이해하여 넘어가고 처리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    우리말샘

주2

부여 궁남지의 가운데에 있는 인공적으로 만든 섬.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말샘

주3

중국 전설에서 나타나는 가상적 영산(靈山). 동쪽 바다의 가운데에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우리말샘

주4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동해에 있다고도 하며 지리산이라고도 한다.    우리말샘

주5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 방장산(方丈山), 영주산을 통틀어 이르는 말.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로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다고 한다. 이 이름을 본떠 우리나라의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이르기도 한다.    우리말샘

주6

발로 밟고 지나갈 때 남는 흔적. 또는 그때 나는 소리.    우리말샘

주7

베틀에 딸린 제구의 하나. 잉아의 뒤와 사침대 앞 사이에 날실을 걸치도록, 가는 나무 세 개를 얼레 비슷하게 벌려서 만든 것이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김길식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