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온달산성 ( )

단양 온달산성 전경
단양 온달산성 전경
건축
유적
문화재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신라의 협축 성곽. 산성.
이칭
이칭
성산성, 城山城, 아단성, 阿旦城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단양 온달산성(丹陽 溫達山城)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9년 07월 26일 지정)
소재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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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신라의 협축 성곽. 산성.
개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이 신라가 쳐들어오자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이야기와 관련되어 이름 불렸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신라 석축산성의 축성 방법이 확인되었고 신라 토기 등도 출토되어, 신라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은 해발 427m의 성산(城山) 정상부에 반월형(半月形)으로 축조된 테뫼식 협축(夾築) 산성이다. 성벽은 남고북저의 지형을 따라 쌓았는데, 남쪽 봉우리 정상부와 북쪽 벽의 안쪽에는 평탄한 땅이 자리하고 있다. 서북쪽은 남한강에 접한 가파른 절벽이며, 동쪽과 남쪽 성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쌓아 올렸다.

산성의 북동쪽 아래에는 온달동굴(천연기념물, 1979년 지정)이 있고, 강 건너 주변 지역에도 휴석동 윷판바위, 장발리 선돌 등 온달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영월 태화산성(太華山城)은 온달산성에서 패한 온달을 위하여 누이동생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이 산성은 물론 주변 지역이 신라와 고구려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대치하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변천

온달산성의 축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 1,523척, 높이 11척의 석축성으로 우물이 1개소 있다”고 하였고,『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온달이 을아조(乙阿朝)를 지키기 위해 축조하였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을아조’는 단양군 영춘(永春)의 옛 지명인 ‘을아단(乙阿旦)’으로,『삼국사기』에서 “온달이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유시(流矢)에 맞아 사망하였다”고 한 내용과도 관련된다. 하지만 아단성을 서울특별시 아차산성(阿且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내용

산성에는 동·남·북의 문터와 남·북 치성(雉城), 우물터, 수구 등의 시설이 남아 있고 3곳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그 외에 신라시대~고려시대의 토기 조각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성벽은 대부분 비슷한 크기로 다듬은 네모난 석회암 널돌을 면과 모를 맞추어 수직에 가깝게 쌓은 모습이다.바깥쪽 경사면 아래부터 일정한 높이까지 체성을 축조하고서물이 나가는 수구(水口)를 안쪽 바닥돌 아래까지 경사지게 만든 다음 위쪽에 체성의 안팎을 협축의 방식으로 쌓아 올렸으며, 성벽의 안은 돌로만 채웠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높이 6∼8.5m, 너비 3.6∼4m 정도가 남아 있고, 북문터와 회절부의 성벽은 계곡에 쌓은 것이어서 너비가 다른 구간에 비해 넓은 편이다.

치성은 북문터와 남문터 부근에 있는데, 아래부분은 길이 5.2m, 너비 5.3m, 높이 8m이며, 단면 삼각형으로 바닥을 보강하여 쌓았다. 문터 옆의 성벽에는 출수구가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한 좌우 성벽과 북쪽벽 구간에는 아래부분에 보축이 이루어졌으며, 보축된 벽면 안에는 깬돌과 점토를 혼합하여 채워 넣었다. 남치성과 북치성은 같은 모습 같은 규모이다. 남문터는 남동향으로 경사진 지형에 자리하였는데, 규모는 길이 6m, 너비 3.9m로 북문터와 같다. 동문터는 너비가 7.3m으로, 현문식(懸門式) 구조로 설치되었으나 뒤에 암문(暗門)으로 사용되고서 메워진 것으로 밝혀 졌다. 배수구는 입수구, 배수로, 출수구를 연결시켜 만들었는데, 입·출수구 모두 사다리꼴 형태이며, 출수구가 입수구에 비해 약간 크다. 배수로의 바닥에는 널돌을 놓았고, 돌틈 사이를 점토로 메워 성벽 속으로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특징

문터 입수구 양쪽에서 확인된 유물 포함층의 맨 밑바닥층에서 6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신라 기와나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고, 그 위로는 경질 토기와 큰 항아리 조각 등 9세기 이후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로써 보아 이 산성은 6세기 중엽 경에 축조되어 9세기 경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 안에서도 같은 시기의 기와나 토기 조각이 다량 수습되어,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이 많은 건물들을 건립하고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와는 선조무늬〔線條文〕, 문살무늬〔格子文〕, 복합무늬〔複合文〕, 민무늬〔無文〕 등의 여러 무늬가 다양하게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굵은 선조무늬가 찍힌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 비교적 이른 시기로 편년될 수 있는 가는 문살무늬〔細格子文〕가 새겨진 황갈색의 암키와 조각도 확인되었다. 토기는 신라 경질토기류, 목에 돌대가 돌려진 경질 큰 항아리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의의와 평가

온달산성은 성벽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고대 성곽의 축성법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성벽의 축조 방법이나 보강 축조 모습, 유물의 출토 현황 등으로 보아, 처음에는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었지만, 6세기 중엽경 신라에 의해 다시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6세기 중엽경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과 함께 신라가 남한강 유역 이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지방지배를 추구하였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산성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온달산성-북문지·북치성·수구 시굴조사 보고서-』(충북대학교박물관, 2003)
『신라육상교통로연구』(서영일, 학연문화사, 1999),
『한국의 성곽과 봉수』상(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1990)
『온달산성 지표조사보고서』(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 1989)
집필자
김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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