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군은 중국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이다. 지금의 한강 이북 경기도 지방과 자비령 이남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고조선에 복속된 진번국의 영역이었으나 고조선이 멸망하고 진번군이 설치되었다. 중국 군현지배에 대한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낙랑군(樂浪郡)에 통합되었다. 요동의 독자세력으로 성장한 공손씨 정권이 낙랑군을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238년 위나라가 공손씨 정권을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 265년 위나라가 진나라에 멸명된 후에는 진나라에 인계되었다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었다.
지금의 한강 이북 경기도 지방과 자비령(慈悲嶺) 이남의 황해도 지방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이를 중국 동북지방에 비정(比定)하는 견해도 있다. 본래 이 지방은 고조선에 복속된 진번국(眞番國)의 땅이었다. 고조선이 멸망된 뒤 한나라 무제(武帝)가 서기전 108년에 설치한 이른바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진번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중국 군현지배에 대한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진번군은 곧 낙랑군(樂浪郡)에 통합되고, 낙랑군은 이곳에 남부도위(南部都尉)를 설치하였다.
2세기 후반 한(韓) · 예(濊)의 토착세력이 강성해져서 이 지방을 공격하게 되자 남부도위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20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실상 요동지방(遼東地方)의 지배자가 된 공손강(公孫康)은 후한(後漢)의 헌제(獻帝) 건안 연간(建安年間 : 196∼220)에 낙랑군 소속 둔유현(屯有縣 : 지금의 黃海道 黃州) 이남의 땅을 떼어서 새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대방군은 이때부터 약 1세기 동안 낙랑군 남부도위 소관의 대방 · 열구(列口 : 지금의 황해도 殷栗) · 남신(南新 : 지금의 황해도 信川) · 장잠(長岑 : 지금의 황해도 豊川) · 제해(提奚 : 미상) · 함자(含資 : 지금의 황해도 瑞興) · 해명(海冥 : 지금의 황해도 海州) 등의 7현(縣)을 관할하면서 치소(治所)는 대방현에 두었다. 현재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동남 문정면에 있는 속칭 당토성(唐土城)은 그 유지(遺址)로 추정되고 있다.
한대 낙랑군이 갖고 있던 역할은 후한말의 혼란 속에서 약화되고, 이후 위 · 진을 거치면서 동방정책의 전초로서의 그 기능과 성격이 변화하였다. 후한말 각 지방 호족(豪族)과 군벌(軍閥)들이 독자의 세력을 구축하면서 그 통제력이 약해지자 요동태수인 공손도(公孫度)는 이제까지의 변방 군현으로서의 모습에서 벗어나 요동지역에 독자의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공손씨 정권은 주변 여러 종족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하면서 세력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특히 공손강은 한반도의 낙랑군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기지화 정책을 펴면서 낙랑군을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태수(太守)를 파견하여 군현을 재정비하면서 한 · 예 세력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군현 기능의 회복은 군사력을 동반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는 한 · 예의 강성으로 낙랑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교섭(交涉) · 교역(交易)체계가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군현의 영역이 잠식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공손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재정비한 것은 기존의 군현 영역과 군사력의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일차적이었으며, 주변 삼한 사회에 대한 교역체계의 복구와 정치적 통제력을 발휘하려는 시도는 차후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손씨 정권대에 이루어진 대방군의 신설은 약화된 군현 자체의 복구를 통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주변 제종족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기능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중원의 정치적 권위 및 교역체계와 연결되지 못한 지방정권으로서 갖는 한계성이 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공손도는 그의 딸을 백제에게 시집보내는 데, 그 시기는 아들인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하기 이전의 일로 보인다. 공손도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는 목표에서 낙랑군의 세력 약화 등 군현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후한이 임명한 낙랑태수가 임지로 부임하는 것을 막은 것과 대방군 설치로 구체화되었다. 공손씨 정권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백제의 도움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당시 한강유역에서 세력이 부상하고 있던 백제국을 통해 낙랑군의 움직임을 계속적으로 견제하는 한편, 대방군의 활동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제 역시 낙랑군의 영향에서 벗어나 계속적으로 성장하고자 했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백제는 한강유역의 마한 사회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손도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백제가 강국이 되었다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238년 위(魏)나라는 공손씨 정권을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위나라는 해상(海上)으로 군대를 보내 낙랑군과 더불어 대방군도 접수하였다. 이때 위나라는 그 여세를 몰아 대방군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후배지(後背地)인 동예(東濊)를 치는 한편, 한강 유역의 여러 토착국가들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구주(九州)에 있는 야마타이국(耶馬臺國)을 초유(招諭)해 그 여왕 히미코(卑彌呼)로부터 조공(租貢)을 받기도 하였다.
이 당시 위나라가 낙랑 · 대방군을 차지한 후 한에 대해 취한 정책은, 군사적인 통제보다는 한의 신지(臣智) 등에게 읍군(邑君) · 읍장(邑長)의 지위와 의책(衣幘)을 사여하는 유화책이었다. 이 때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을 착용한 자가 천 여인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위는 중원과 한 지역과의 교역망을 회보하면서 이를 이용하여 삼한 지역에 대한 분열책을 동시에 진행시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위는 촉나라와 오나라와의 항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후의 안정과 동시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려는 목적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주변 제세력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와 교역망의 재편이라는 방향에서 동방정책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에 의한 강력한 군사행동이 뒤따르게 되고 주변세력의 재편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중원에서의 삼국의 대립 상황과 동이 사회의 성장에 따른 저항으로 인하여 이러한 공세적 기조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위의 동방정책 자체는 중원에서의 세력 경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동방정책 실현의 주체 역시 낙랑군 등 군현 단위가 아니라 유주자사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뒤 265년 위나라가 진(晉)나라에게 멸망된 뒤 대방군은 진나라에 인계되었다. 진나라는 274년 유주를 나누어 평주(平州)를 새로이 설치함과 동시에 동이교위(東夷校尉)를 두었다. 이에 따라 대방군은 낙랑군과 더불어 평주로 소속이 이관되었다. 진나라 초기에는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수행해 대방군의 세력도 한때 강화되는 듯했으나, 290년대에 들어와 국내의 혼란과 선비족(鮮卑族) 등 유목민족의 압박을 받아 점차 약화의 길을 걸었다.
진나라의 동방정책의 기조는 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으나 달라진 교섭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우선 백제와 신라의 성장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소국 단위의 교섭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동방에 대한 관심을 넓히면서 위대에 접촉이 없었던 소국과의 교류가 새로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진나라의 적극적인 동방정책의 결과라기보다는 동이사회의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진 데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전 시기와 크게 달라진 것은 주변 제국가와 진나라 중앙정부와의 직접적인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동이교위가 그 중심역할을 수행함에 따라 낙랑 · 대방 · 현도군 등은 변군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쇠퇴해 갔다. 이제는 국가와 국가의 교섭이라는 새로운 외교질서로 변화되어 가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미천왕 때 서안평(西安平)을 고구려에 빼앗기면서 중국 본국과의 육상교통이 두절되어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313년 대방 · 낙랑 양군 지역에서 버티고 있던 장통(張統)이 고구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한인(漢人)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달아나자 대방군은 고구려에 멸망해 점령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때 낙랑군은 고구려에, 그리고 대방군은 백제에 각기 병합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대방군은 멸망된 뒤 요동지방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선비족의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요서 대릉하(大凌河) 방면에 다시 설치되었다가 430년대 북위(北魏)에 의해 폐지된 바 있다.
한편 백제는 위대에 들어와서 대방군의 지위가 약화되고 낙랑군이 다시 강화되면서 중국 군현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진대에 들어서면서 백제는 276년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시작으로 286년에 책계왕(責稽王)이 대방왕의 딸을 부인으로 삼게 된다. 이는 공손씨 정권에 이어 두 번째로 이루어지는 중국세력과의 결합이다. 역시 백제는 대방군과의 연결을 통해 낙랑군의 영향에서 벗어나 내적인 성장을 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낙랑군과 고구려에 강력한 반발을 가져와 낙랑군과 고구려의 침입을 불러오고 그로 인해 백제왕이 살해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