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대(前漢代)에서 진대(晉代)까지 요동군(遼東郡)에 소속되어 있던 현(縣)으로, 왕망(王莽) 때 일시 북안평(北安平)으로 그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 이곳은 요동지역과 평양방면을 연결하는 교통로상의 요지였다.
만약, 이곳을 고구려가 장악하면, 낙랑군과 대방군을 고립시킬 수 있다. 그러한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이곳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중국세력간의 분쟁이 거듭되었다.
146년(태조왕 94) 8월에 서안평을 공격하여 마침 이곳을 지나던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있으며, 242년(동천왕 16)에도 서안평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지』 「위서」에 보인다.
이 지역은 마침내 311년(미천왕 12) 고구려의 영역으로 병합되었다. 그 결과로 고립된 낙랑군과 대방군을 각각 313년과 314년에 고구려군이 공략하여 병탄하였다. 이 지역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우리 나라의 강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