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만로(葛蔓盧) 또는 갈거맹광(葛居孟光)으로 전해지기도 하며, 갈로와 맹광을 두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의 가계나 행장은 알 수 없으며, 다만 436년(장수왕 24)북위(北魏)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한 북연(北燕)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고구려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활약한 사실만이 전해지고 있다.
북연은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후연(後燕)을 계승한 나라이며, 고구려계인 고운(高雲)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고운의 즉위를 축하하며 같은 종족으로서의 우의를 표했고, 고운도 이에 답례해, 양국은 친선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뒤 고운이 피살된 뒤 친구였던 풍발(馮跋)이 즉위했는데, 고구려는 풍씨 왕들과도 친선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당시 동으로 세력을 뻗쳐오던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양자는 서로 협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위의 공격이 가열되자, 북연 황제 풍홍(馮弘)은 435년 양이(陽伊)를 고구려에 보내, 고구려군을 파견해 북연 지배층을 고구려로 망명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갈로맹광을 시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연의 수도 화룡(和龍)에 가 그 임무를 수행케 하였다. 고구려군이 화룡의 교외에 도착할 즈음 북위 원정군도 성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성 안에서는 황제 등 고구려에 의존하려는 세력과 상서령(尙書令)곽생(郭生) 등 북위에 투항하려는 일파가 대립해 있었다.
후자측에서 먼저 성문을 열고 북위군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북위군이 주저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 갈로맹광은 고구려군을 성 내로 돌입시켜 무기고를 점령하고 반대파를 제압, 성내를 장악하였다. 이어 성 내를 약탈하고 불을 지른 뒤 풍홍 이하 주민들을 몰아 고구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 때 갈로맹광의 고구려군은 후미를 담당해 북위군을 경계하면서 서서히 동으로 나아갔다. 망명의 행렬은 80여 리에 이르렀고 북위군과 고구려군은 시종 첨예하게 대치했으나, 양자의 무력충돌은 없었다. 갈로맹광의 이외 행적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