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목(靑木)을 개성 서북방 지역으로 보는 것은 조선 말기까지 이곳에 청석(靑石) 옛 진보〔古鎭堡〕와 함께 고개에 관성(關城)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목령은 고구려와 국경을 이루는 백제의 국경요새로서 매우 중요시되던 곳이며, 개로왕 때까지 많은 전투가 있었다. 373년(근초고왕 28)에 청목진에 성을 쌓아 방위를 튼튼히 하였다.
386년(진사왕 2)에 15세 이상인 자들을 징발하여 관방(關防)을 건설하였는데 청목진에서 시작하여 북쪽은 팔곤성(八坤城)에, 서쪽은 바다에 이르렀다. 395년(아신왕 4) 고구려 광개토왕이 친히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패수(浿水) 강변에 진을 치고 침공해오니 백제의 군사들이 이들과 싸웠으나 크게 패하여 사망자가 8,000명이나 되었다.
그 해에 왕은 패수전을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 청목진 밑에 이르렀다. 그러나 큰 눈을 만나 사졸이 많이 동사(凍死)하므로 회군하여 한산성에 이르러서 군사를 위로하였다.
469년(개로왕 15)에는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울타리를 쳤다. 475년(문주왕 1)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포위하여 달아나는 개로왕을 살해함에 따라 한성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 이 시기에 청목령이 고구려의 영토가 된 것이다.
청목령은 멸악산맥의 고개로서 소백산맥의 조령(鳥嶺)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 평양지역에서 개성을 잇는 간선도로가 이 고개를 통하여 이어졌고 이곳을 통하여 철원이나 평강 등의 관북지역과도 연결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의 북부외곽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