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부산광역시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포구(浦口).
형성 및 변천
부산참(釜山站)은 위급 사항을 알리는 군사시설이었으며 부산창(釜山倉)에는 왜관(倭館)의 비용을 쓰기 위하여 동래 · 울산 · 기장(機張)에서 수납한 세미(稅米)를 보관하였다. 부산포진 안에 있는 염전(鹽田)은 영내의 비용을 충당하는 데 이용하였다. 세종 때 허가한 왜관은 부산진의 성 밖에 울타리를 치고 살도록 하였는데, 그 수가 늘어 중종 때 300여 명에 달하였다.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 부산포진 첨사 이우증(李友曾)이 살해된 뒤 왜관을 폐쇄시켰다가, 1678년(숙종 4)에 왜관을 초량(草梁)으로 옮겨서 설치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산진성은 왜군의 첫 공격 지점이 되었으며, 이때 부산첨사 정발(鄭撥)이 순직하였다. 같은 해 9월 1일 이순신(李舜臣)은 부산포해전에서 왜선 100여 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행정구역상으로 부산포는 동래도호부의 부산면(釜山面)으로 존속하였다. 부산포는 부산면에 있었던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07년부산부(釜山府)가 설치되면서 부산포는 동래에서 분리되었다. 부산포는 왜관 · 부산개시(釜山開市) · 부산진성 등을 통하여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의 거래가 가장 밀접하였던 곳이었다.
부산의 지명 유래는 1368년(공민왕 17)에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이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기증하는 백미 1,000석을 부산포에서 반출할 때 산의 형태가 솥처럼 생겨서 이때부터 부산(釜山)이라 불렀다. 그러나 부산포(富山浦)라는 지명은 일찍부터 사용하였고 부산(釜山)이라는 지명과 혼용한 것 같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
- 『대동지지』
- 『한국군제사』(육군본부, 1968)
- 『지방행정지명사』(내무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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