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도성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도성이다. 유적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에 있다. 지안시 북쪽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에서는 198년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 파괴와 개축을 거쳐 342년까지 도성의 주요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는 5세기 중반 이전에 도성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환도성은 고구려 198년(산상왕 2)에 축조되었고, 209년에 산상왕이 환도성으로 천도하면서 도성으로 사용되었다. 47년간 도성으로 사용되었던 환도성은 246년(동천왕 20)에 조위(曹魏)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의 공격으로 파괴되어 그 기능을 잃었다가, 342년(고국원왕 12)에 수리된 뒤 고국원왕이 옮겨가 살기도 하는 등 도성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전연(前燕)의 침공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산상왕 대에 환도성을 축조하고 그곳으로 천도한 배경으로 공손씨의 침공에 대한 대비를 지적하기도 하고, 고국원왕이 환도성을 수리하고 옮겨가 살았던 배경 역시 전연의 침입에 대한 대비로 해석되는 등 환도성은 군사적 방어에 유리한 곳으로 추정된다. 또, 『삼국지』에서 '환도'가 산으로 묘사됨으로써, 환도성은 평지 도성 인근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초 이래의 고고조사에 의해, 늦어도 산상왕 대 이후의 고구려 도성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으로 비정되었고, 특히, 1906년에 지안시 북쪽의 소판차령(小板岔嶺)에서 「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됨에 따라 환도성은 지안의 산성자산성으로 비정된다.
한편, 『삼국사기』에서 드러난 환도성의 기능과 역할이 위나암성과도 비슷할 뿐만 아니라, 『주서』에 묘사된 "성 내부에 군량과 무기 등을 비축해 두었다가, 구적(寇賊)이 이르는 날에 모두 들어가 굳게 지킨다"는 평양성의 기능과도 부합한다. 이는 고구려 도성의 중요한 특징을 비상시에는 방어 기능과 평상시에는 통치 기능을 분담하는 산성과 평지성의 조합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지안 평지성(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는 환도성은 성 내부에서 바깥으로 계곡이 흐르는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남쪽 계곡 입구를 정문으로 삼고 주변의 험준한 산 능선을 따라 석축 성벽을 쌓았다.
2001~2003년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성벽의 전체 둘레는 약 7km이다. 성문은 남쪽에 3개, 북쪽에 2개, 동쪽과 서쪽에 1개씩 총 7개가 확인되었다. 남문을 통해 성 내부로 진입하면, 올라서서 지안 평지성을 조망할 수 있는 석축 장대가 있다.
장대의 동북쪽에서는 남북 95m, 동서 62m 범위에 3단으로 구성된 대지가 조성된 흔적이 확인되었고, 이곳에서 건물지 여러 동과 기와 및 와당 등 다수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곳을 궁전지로 보기도 한다. 환도성 정문 앞으로는 동북쪽에서 흘러온 통구하(通溝河)가 방향을 틀어 동남쪽으로 흘러 지안 평지성(국내성)의 서쪽 성벽 옆을 지나 압록강과 만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환도성은 2세기 말에 축조된 이래 파괴와 개축이 반복되어서, 축조 연대를 알 수 있는 유구나 유물이 잘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20012003년의 조사에 따르면, 환도성의 성문지 혹은 내부 건물지 등에서 출토된 와당 가운데, 4세기에 유행한 권운문 와당이나 45세기에 유행한 구획선 연화문 와당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른바 궁전지의 가장 아래 문화층과 성문지 등에서 5세기 후반 이후 유행하는 구획선 없는 연화문 와당이 대거 출토되었고, 또 이곳에서 출토된 양이부호 역시 남한 내 여러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5세기 중후반으로 편년되는 양이부호와 동일한 형태로 파악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정황에 따라, 현전하는 환도성 유적은 평양도읍기인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성 내부에서 적석총 36기와 석실봉토분 2기로, 총 38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는데, 대체로 4~5세기 초로 편년됨에 따라 이때에는 환도성이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결국 고고학적으로는 환도성이 도성으로 사용되었던 3세기 전반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전연에 의해 파괴된 이후 고분이 조영되는 등 사실상 폐기되었다가, 6세기에 다시 개축되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양원왕 13년(557)조 '환도성간주리(丸都城干朱理)'의 반역기사가 참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