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魏)를 국호로 가졌던 중국의 역대 왕조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위[서기전 376225년], 삼국시대(三國時代) 조위(曹魏)[220265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북위(北魏)[386534년], 북위의 후신인 동위(東魏)[534550년]와 서위(西魏)[535~556년] 등이다.
이 가운데 전국시대 위의 역사만을 다루어 '위서'로 불릴만한 역사서의 존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위서'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역사서의 존재가 현재 전하는 것은 어환(魚豢)의 『위략(魏略)』, 진수(陳壽)의 『위지(魏志)』, 왕침(王沈)의 『위서』 등 '조위'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와 위수(魏收)의 『위서』 등 북위[동위, 서위 포함]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 등이다.
경우에 따라서 '위서'는 왕침이 지은 『위서』 혹은 위수가 지은 『위서』 등 '위서'라는 이름의 특정 사서만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조위와 북위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의 범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조위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 특히 진수의 『위지』를 『전위서(前魏書)』, 북위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 특히 위수의 『위서』를 『후위서(後魏書)』로 특칭하기도 한다. 한편,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고조선조(古朝鮮條)에 『위서』가 인용되었는데, 이때의 『위서』가 어떤 책을 가리키는지에 관해 여러 이견이 있다.
좁은 의미로 '위서'라는 이름을 가진 역사서는 조위 역사를 기록한 왕침의 『위서』와 북위 역사를 기록한 위수의 『위서』, 위담(魏澹)의 『위서』, 장대소(張大素)의 『위서』 등이 있는데, 이 중 현재 전하는 것은 위수의 『위서』뿐이다.
위수의 『위서』는 북제(北齊) 천보(天保) 2년(551)에 위수(506~572)가 문선제(文宣帝)의 명을 받들어 편찬되기 시작하여, 천보 5년(554)에 제기(帝紀)와 열전(列傳), 지(志)가 완성되었다. 선비족(鮮卑族)의 시원부터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까지 기술하여, 북위와 그 전후의 역사를 포괄한다. 제기 14권, 열전 96권, 지 20권 총 130권이다.
북위 말부터 북제 시대에 살았던 위수는 수사(修史) 당시, 대국사파(代國史派)와 위사파(魏史派)의 대립, 대체제(代體制)와 효문체제(孝文體制)의 대립으로 일컬어지는 호(胡) · 한(漢) 간의 모순이 첨예화된 정치적 영향을 받았고, 이에 따라 『위서』는 편찬 직후부터 예사(穢史)라는 비판을 받는 등 평가가 높지 않았다.
또한, 『위서』는 북위-동위-북제를 정통에 두며, 서위의 황제들을 배제하였고, 서위-북주(北周)의 정통을 이은 이후의 왕조로서는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수(隋) 양제(煬帝)는 위담을 시켜 서위를 정통으로 하는 『위서』를 다시 쓰게 하였고, 당(唐) 대에도 장대소 등의 개작이 있었지만, 모두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호 · 한 대립과 북제-북주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갈등에 따라 당대부터 평가가 엇갈렸지만, 『위서』는 탁발선비(拓跋鲜卑)의 시원부터 시작하는 북위 건국 이전의 역사를 상세히 전할 뿐만 아니라, 기왕의 『백관지(百官志)』와 달리 관제와 함께 선비의 사회조직 등을 설명한 「관씨지(官氏志)」, 불교 등의 종교와 사원(寺院) 경제를 설명한 「석노지(釋老志)」 등의 편목을 새롭게 추가하는 등 당시의 역사상을 풍부하게 전한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반면, 위수가 주로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여, 호(胡)에 대한 기술이 매우 소략하고 왜곡이 많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위수의 『위서』는 이미 북송(北宋) 대에 많이 망실되어, 북송 대 유서(劉恕) 등이 『북사(北史)』, 『고씨소사(高氏小史)』, 위담의 『위서』, 장대소의 『위서』 등을 근거로 개수하여 현존본이 되었다.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조에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는데, 요(堯)와 같은 때이다[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堯]同時]."라는 내용의 위서 인용문이 전한다.
그러나, 위서라는 이름으로 현재 유일하게 전하는 위수의 『위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이지 않으며, 진수의 『위지』 등 현전하는 넓은 의미의 위서에도 위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진수의 『위지』를 위지(魏志)로, 위수의 『위서』를 후위서(後魏書)로 각각 인용한 사례가 별도로 있다. 이에 따라 위의 인용문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먼저, 조작설이다. 단군 전승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일연(一然)이 중국 정사(正史)에 의탁해 조작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근거는 두 가지인데, 현전 『위서』에 위의 내용이 없다는 사실과 단군 전승은 고려시대에 성립되었다는 해석이다. 10세기 이후에 성립된 단군 전승이 그 이전에 편찬된 위서에 실릴 수 없다는 논리이다.
반면, 단군 전승이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위의 인용문을 실재하는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현재 전하지 않는 역사서에 있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 일서(逸書)설이다. 이 경우, 일서의 기술 대상에 따라 다시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
첫째는 왕침의 『위서』 등 조위의 역사를 다룬 사서로 보는 견해이다. 『삼국유사』는 『위지』와 『후위서』 등 구체적인 서명을 인용한다는 분석에 따른 추정이다.
둘째는 북위의 역사를 다룬 위수의 『위서』로 보는 견해이다. 물론 현전하는 위수의 『위서』에는 위의 내용이 전하지 않지만, 현전 『위서』는 북송 초의 교감본(校勘本)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위수의 『위서』는 찬술하던 당시부터 비판을 받았고, 북제 대에 예사로 평가되며,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쳐서 당대까지 다수의 이본(異本)이 있었는데, 이본들이 이미 북송 초에 많이 산일되었고, 현전 『위서』는 그 이후의 교감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는 북송 초 교감본 이전에 만들어져 고려에 전래된 동서(同書) 이본일 가능성이다.
셋째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로 보는 견해이다.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 등에는 위만(衛滿)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일관되게 위만(魏滿)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 해석이다.
다만, 세 견해 모두 단지 추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