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은 초기국가시대 고조선의 제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BCE.2333년부터 BCE.1122년까지이며 단군왕검·단웅천왕이라고도 한다. 천제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서기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 이후 나라를 다스리다 1908세에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스님 일연이 쓴 『삼국유사』이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단군을 고조선의 시조로 이해하여 평양에 사당을 짓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과 함께 모신 이후로 단군은 한민족의 명실상부한 시조가 되었다.
단군(壇君) · 단군왕검(壇君王儉) ·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 서기전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와 우리 나라의 『고기(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대비된다. 한편, 고려시대의 기록으로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가 있으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조선 초기의 기록인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군의 탄생과 고조선 건국에 관한 문제를 논급할 때 일차적으로 인용하는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먼저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환인의 서자(庶子: 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 환웅이 자주 세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환웅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 명(命) · 병(病) · 형(刑) · 선(善) · 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렸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 속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였는데 3 · 7일(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이것을 못 참아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해 혼인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壇君王儉)이다. 왕검이 당고(唐高 : 중국의 성군인 三皇五帝 가운데 堯임금을 말함. 당시 고려의 3대 왕인 定宗의 이름이 堯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비슷한 의미인 高자로 대신 쓴 것임) 즉위 후 50년인 경인(庚寅: 당고의 즉위년은 戊辰이므로 50년은 丁巳요 경인이 아니니 틀린 듯함)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弓 대신 方자로도 씀)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하였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나라 호왕(虎王: 주나라의 武王을 말함. 고려 2대왕 惠宗의 이름 武를 피한 것임)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의 임금으로 봉하였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한편, 『제왕운기』에서는 『본기(本紀)』(본기는 ‘단군본기’인 듯함)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여 주고 있다.
“ 상제(上帝)인 환인에게 서자인 웅(雄)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널리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 하여 웅이 천부인 3개를 받아 귀신〔鬼〕 3,000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려오니 이가 바로 단웅천왕이다.……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셔 사람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조선 지역에 근거하여 왕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시라(尸羅: 신라) · 고례(高禮: 고구려) · 남북(南北) 옥저(沃沮) · 동북(東北) 부여(扶餘) · 예(濊) ·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계이다. 1,038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죽지 않은 까닭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단군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두 기록은 기본적인 내용에서는 비슷하나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먼저 단군을 표현함에 있어 『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壇)’자로 단군을 기록하고 있고 『제왕운기』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자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각기 다르게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후자로써 단군을 나타낸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조에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함께 기록하고 있으나, 『제왕운기』에서는 전조선(前朝鮮)이라는 항목에서 단군에 의한 조선을 기술하고, 후조선(後朝鮮) 항목에서 기자에 의한 조선을 언급하여 후속하는 위만조선과 함께 삼조선(三朝鮮)으로 구분하여 파악하고 있다.
단군신화 관련 내용은 단군 연구에 있어 기본적인 자료로서 활용되었으나, 중심적인 내용은 『삼국유사』의 것을 근간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첫째,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한 종족 신화이던 것인데, 대몽항쟁(對蒙抗爭)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에 민족의 시조로 받들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편찬 시기가 위에서 언급한 시대와 거의 같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이는 앞서 『제왕운기』에서 구월산(九月山)을 아사달산으로 보고 거기에 사당이 존재한다는 내용과도 연결된다.
한편,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함께 모신 이후로 단군은 명실상부한 국조(國祖)가 되었다. 또,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 환인 · 환웅 · 단군을 배향)가 있고 강동(江東)에는 단군의 무덤이 있다는 주장까지 등장하였다.
둘째, 단군과 관련하여 ‘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라는 견해가 전개되었다. 즉,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 · 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 ‘ᄇᆞᆰ사상’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가지는 민족이 분포하는데, 종족적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문화적으로 일련의 관계가 있다는 견해이다. 여기서 백산(白山)은 그 중심이고 이 문화가 우리 역사에서 구체적 실체로 나타난 것이 단군과 부루(夫婁)라는 것이다.
셋째, 단군신화에 대한 고고학적 견해도 제기되었다. 즉,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돌방〔石室〕내의 화상석(畵像石) 그림이 문헌에 보이는 단군 신화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의 내용은 북방계의 샤머니즘과 관련되며, 이들 특성은 종족 이동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최근 이 견해의 근간이었던 무씨사당 화상석의 내용이 단군신화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넷째, 단군신화에 관한 문헌 위주의 해석이 아닌 역사적 입장에서 결론을 내린 견해도 있다. 즉, 이 신화가 삼신사상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이라는 두 계통의 신화가 혼재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신화를 달리하는 두 종족이 정치 · 사회적으로 통합되면서 이들 두 종족의 시조신화가 혼재된 것이며, 이것이 고조선의 일부족적 시조설화였던 것인데 삼국통일과 고려시대에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한민족의 시조신화로 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다섯째, 단군신화는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하였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이라고 보고,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적(祭主的) 의의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의 의의가 강하므로,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이 명칭상에서 구분된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여섯째, 단군신화를 단순한 신화나 토테미즘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 우리 민족 태고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원시 부족들의 원시 신앙에 관한 내용을 『삼국유사』의 기록과 비교하여, 농경관계 기사를 곡물 재배 민족의 제의(祭儀)로 파악하고 환웅과 웅녀를 쌍분체제(雙分體制, dual organization)로 간주하며,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을 일광금기(日光禁忌)와 탈피(脫皮)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다.
일곱째, 단군신화의 신화 자체에 나타난 사회상을 강조하고, 또 이를 신봉한 집단이 어떠한 사회집단이었는가를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고조선의 계보가 한족(漢族)의 기자전설이 개입되어 혼란이 있음을 지적하고,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에서 교체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고조선에 단군조선과 종래의 기자조선을 포함시킨다.
이상의 여러 견해들을 감안할 때 단군신화에 대한 이해는 문헌과 고고학적 방법을 연결시켜 분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즉, 단군신화가 포용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가 과연 고고학적으로 어떠한 문화를 내포한 시대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한편, 단군을 중심으로 볼 때 웅녀의 존재는 곰의 자손이라는 사상이 중심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신화 내용을 동북아시아 지역과 연결시켜 고려할 때 고아시아족(古亞細亞族, Paleo Asiatic)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다. 이들의 시조신화에는 곰 숭배사상이 나타나며 그들은 자신들이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고아시아족이 곰 숭배와 함께 갖고 있는 샤머니즘에서의 종교적 요소와 단군신화를 비교해 보면, 최고의 샤먼을 지칭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신화의 ‘단군’, 그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界木) 관념과 단군신화의 신단수 등은 단군신화의 내용을 고아시아족과 연결시켜 파악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 지역과 관련되며,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담당자가 고아시아족이라는 사실에서, 단군신화의 시대적 성격이 신석기문화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로 변화한 것이 종족과 문화 변화의 결과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의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종족이 알타이 계통의 예맥족이며, 그 출현 시기는 이른바 기자조선으로의 변화 시기와 부합한다는 것에서 그 전환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와 함께 단군의 개국 연대가 중국의 요임금과 연결되어 있으나 이 점은 더 연구를 필요로 한다. 최근 이 시기의 문제와 관련하여 요령(遼寧)지역의 풍하문화(豊下文化: 夏家店下層文化)가 청동기문화로서 단군의 개국연대와 연결된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 문화와 우리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약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단군신화를 시대적 변화를 계기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즉, 첫째 단계에서는 씨족 사회에서의 단순한 씨족 토템이 생겼고, 둘째 단계에서는 ‘군사 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이며, 셋째 단계에서는 계급국가 형성 후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으로 보는 것인데, 이에는 보다 철저한 검증이 요구된다.
또, 단군 관계 문헌에 대하여, 『삼국유사』를 불가(佛家) 계통의 사서로, 『제왕운기』 등은 유가(儒家) 계통의 사서로, 『규원사화(揆園史話)』 ·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을 도가(道家) 계통의 사서로 보아 단군조선의 역사가 47대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실사(實史)였음을 강조하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역대 단군 인식의 변화를 시기에 따라 네 단계로 구분해 보기도 한다. 제1단계는 고조선 당시의 단군 인식으로, 고조선 시조신으로서의 단군이며, 제2단계는 고조선 멸망 이후부터 고려 중엽(13세기)까지로, 단군을 한반도 서북지역에서 지역신으로 인식되던 시기라고 한다. 제3단계는 고려 중엽에서 한말(20세기 초)까지이며, 이 시기는 단군이 한국의 국조, 즉 나라를 처음 있게 한 시조로 숭배되던 시기이며, 제4단계는 한말부터 현재까지로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인식되는 시기라고 본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해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어쨌든,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이 단합하는 구심체 구실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大倧敎)다. 개천절은 이 종교에서 행하던 의식이었으나 광복 후에는 정부에서 정식으로 개국에 관한 국경일로 정하게 되었다. 한동안 우리 나라에서 사용한 단기(檀紀)는 고려 말 우왕의 사부였던 백문보(白文寶)가 처음 사용했으며, 단기 원년을 서기전 2333년으로 보는 근거는, 조선시대의 사서인 『동국통감』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요임금 즉위 25년 무진으로 본 것에 있다. 단기의 사용은 1962년 1월 1일부터 중지되고 서기로만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