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그 기록이 나타나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환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정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왕운기』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3,000의 무리가 3,000의 귀신으로, 단(壇)이 단(檀)으로 다르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커다란 차이는 두 기록에서 나타나는 신단수에 관한 관념의 차이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언제나 단수 아래에서 웅녀가 빌어 아기 가지기를 원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반면에 『제왕운기』에서는 “웅이 그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셔 사람의 몸을 가지게 한 뒤 단수신과 혼인하여 생남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신단수가 영험이 있는 기원의 대상이라면, 『제왕운기』의 신단수는 신수(神樹)의 관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수인신(樹人神)의 형태까지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단수는 환웅이 내려온 곳이고, 아기를 기원할 수 있는 대상이므로 천신숭배사상과 수목신앙이 결합된 형태를 간직한다. 신단수의 후대적 모습은 서낭나무·당산나무 등으로 연결되며 그에 대한 신성성과 기원의 관념은 지속된다.
신단수는 이와 같이 민간신앙적 측면에서 수목신앙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만주나 몽고 등지의 동계 문화권에서부터 북구 지역에 이르기까지 두루 등장하는 세계수·무수(巫樹)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