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한 기록은 비록 고려조에서부터 보이나 그 연원은 오래되어 고대의 산신신앙이나 무속신앙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별기은제는 별기은사사(別祈恩寺社)에서 행했던 불교의 불사(佛事)와 도교의 초제(醮祭) 형태로 행해진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중 도교의 초제가 무속의례였을 가능성이 이혜구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고종 4년(1217)에는 나라에서 환란을 막고 외적의 퇴치를 기원하고자 별례기은도감(別禮祈恩都監)을 설치하였고, 외산기은별감(外山祈恩別監)이 각처로 파견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산에서 별기은제를 치루었음을 알 수 있다.
별기은이 무격의 행사로 치뤄졌다는 기록은 공양왕 때 불사나 초제 외에 무당지사(巫堂之祀)도 자주 있었다고 하는 데서 본격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공양왕 때의 김자수열전(金子粹列傳)에는 별기은을 배격하는 상소문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고려 말의 별기은이 국행제로 무격의 제사로 행해지고 있으며, 계절별로 지내는 네 번의 정기제와 수시로 지내는 비정기제(별제)가 있었고, 그 제장(祭場)은 10여 개소나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터무니없이 국행을 칭탁하여 유사가 힐난치 못하는 까닭으로 가득 마시고 자약(自若)하여 구가(九街)의 위에서 고취하고 가무하여 마지않는 바가 없으므로 풍속의 아름답지 않음이 심하다.”는 별기은제를 배격하는 상소문에서 무격들이 국행에 힘입고 있을 뿐이지 일반 민가에 행하던 굿과 다름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태조·태종·세종 때에도 별기은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별기은제를 지내던 명산대천은 고려시대에는 덕적(德積)·감악(紺岳)·백악(白岳)·송악(松岳)·목멱(木覓)·개성대정(開城大井)·삼성(三聖)·주작(朱雀) 등 여덟 군데였으나, 태조 때에 덕적·감악·개성대정 등 셋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엽의 궁중(宮中) 발기를 보면 별기은제를 지낸 곳은 위의 세 군데로 한정되지 않고, 고양(高陽)·장단(長湍)고개·송악 등지에서도 치성을 드렸음을 알 수 있다.
별기은제에 모셔지는 신격은 주로 높은 어실당·별군웅(別軍雄)·산마누라(山神)·왕신(王神)·국대부인(國大夫人)·자안아기시·호고아기시·말명·용왕(龍王) 등이다. 이상의 신격은 1866년(고종 3)의 발기에 열거된 것으로 해마다 달라질 수 있음을 여타의 발기를 통해 확인하게 되고, 민가의 무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별기은제는 궁중무속을 보여주는 사례이고, 산기도·별기도와 일치되는 명산대천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일반 무속에서 섬기는 방법과 제차가 흡사하고, 신의 종류까지도 마찬가지여서 궁중의 여성이 민가의 습속을 지켰음을 확인하는 증거이다.
당대의 유학자들이 허황된 음사(淫祀:함부로 제사 지냄. 부정한 귀신을 제사지냄)로 규정지었던 일도 있으나, 궁중에서도 무속이 면면하게 이어져왔으며, 이를 신봉하는 여성들의 생활상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