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산은 현재의 남산을 일컫고, 목멱신사(木覓神祠)에 대한 이칭은 흔히 국사당(國師堂)이라고 하였다. 목멱신사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 두루 보인다.
목멱산신을 모시게 된 내력은 『태조실록』 4년 조를 보면 알 수 있다. 태조가 이조에 명하여 남산을 봉하여 목멱대왕으로 삼은 뒤 경대부와 사서는 제사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목멱신사는 목멱산 마루에 있어서 봄과 가을로 초제(醮祭)를 행하였다고 전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경성 목멱산 잠두봉 국사당 음사(京城 木覓山 蠶頭峰 國師堂 淫祀)”라고 해서 비판한 바 있고, 목멱산신에게 제사를 베풀 때는 전사청(典祀廳)을 국사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고려공민왕, 본조 승 무학(本朝 僧 無學), 고려 승 나옹(懶翁), 서역 승 지공(指空) 등의 영상 및 기타 제신상을 걸어놓았다.
또 맹자상(盲者像)과 소녀상이 있는데 소녀상은 두신(痘神)이라 하여 신전에 지분 등을 베풀어 지나치게 설혹(褻惑: 더럽고 정신없게)하였고 기도 또한 성대히 베풀어 나라에서도 금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멱신사에서 배향되는 신격은 모두 무속에서 섬기는 신들이므로 무속신앙의 형태를 확인하게 된다.
목멱신사는 한마디로 나라에서 행하는 굿을 베풀던 사당이고, 산천제의 기능을 하던 곳이라 하겠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나라에 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산천에 제를 지냈다고 하였으니 목멱신사도 그러한 제를 지냈던 곳이다.
목멱신사에 주로 빌었던 내용은 나라를 지키고 복을 비는 수호기복, 왕가나 왕손의 병을 구원하자는 구병 등이 대부분이다. 고대로부터 지속되어온 산악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고, 그것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신당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 목멱신사이다.
이 신사는 1925년까지 본래 남산 팔각정이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남산에 신궁(神宮)을 지으면서 목멱신사가 그들의 신궁보다 높이 있다고 하여 지금의 인왕산 국사당자리로 옮기도록 강요했다.
때문에 남산의 당을 헐고 사당의 일부를 인왕산 서쪽으로 옮겨 조립해서 그 형태나 구조가 원형과 비슷하게 남게 되었다. 목멱신사가 훼철되고 사당의 일부가 이전된 후 인왕산 국사당이란 명칭으로 1973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고, 이곳의 무신도 28점은 이보다 앞서 1970년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