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국사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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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서울 인왕산 국사당 전경
서울 인왕산 국사당 전경
민간신앙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인왕산(仁王山)에 있는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여러신을 모신 신당. 국가민속문화재.
이칭
이칭
국사당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민속문화재(1973년 07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 종로구 통일로18가길 20 (무악동)
내용 요약

인왕산 국사당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인왕산에 있는 무속 신앙에서 섬기는 여러 신을 모신 신당이다. 1973년 7월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원래는 남산 꼭대기에 있다가 현재는 인왕산 선바위 밑에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고(태조 5년 12월) 호국신으로 삼았다. 국사당이라는 명칭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타난다. 국사당은 1925년 남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사인 조선 신궁을 지으면서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다.

목차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인왕산(仁王山)에 있는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여러신을 모신 신당. 국가민속문화재.
내용

1973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동(棟).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현재 인왕산 기슭의 선바위 밑에 위치하고 있으나, 원래는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따라서 그 연혁은 남산과 관련된 신앙의 역사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태조 5년 12월) 호국의 신으로 삼아(태종 4년 9월)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태종 8년 5월, 9년 7월)고 하며, 아울러 신주(神主)가 있었음도 언급하고 있다(태종 12년, 2월).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에 의하면, 목멱신사라는 명칭의 사당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 · 가을에 초제[醮祭][^1]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러나 국사당이라는 명칭과 무신도(巫神圖)에 대한 언급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현재 국사당의 전신이다. 1972년 당시 당 관리인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엽에는 이미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었고, 다만 주2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먼저 이 당을 거쳐가고는 하였다고 한다. 민중전(閔中殿)이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3]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궁중 발기에는 인근 각처의 명산과 당 · 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 국사당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한다. 국사당은 1925년 남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도의 신사인 주4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국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현재 당의 평면은 전면 3칸에 측면 2칸의 주간(柱間)이고, 기둥 간 사이는 전면 어간(御間) 약 2.6m에 주5과 측간(側間)은 모두 2.4m이다. 따라서 내부의 넓이는 도합 11평이고,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동서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루 좌우 일부와 뒷면 및 전면에는 무신도가 걸려 있고, 평면 전체가 주16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민간의 일반건물들보다 단순한 구조이지만 규모는 더 큰 편이며, 기둥 위의 구조나 지붕형태 등 전체적인 구성이 견실과 간소를 위주로 하면서도 방주[方柱][^6]의 실귀[糸刻][^7]나 주8의 긴 형태, 주9의 새김 등과 같은 드러나지 않는 세밀한 부분에서는 최소한도의 세련된 장식요소가 가해져서 우아한 면도 엿보인다. 아울러 주10주11이나 주12주13, 규격 설정 등에서 경공[京工][^14]의 솜씨를 엿볼 수 있어서, 영조 · 정조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한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국사당은 굿만 하는 곳이 아니라 단골신도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참배객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연중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고 그 다음이 2월 · 3월 · 9월의 순이다. 이 당에서 행하는 굿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이고, 둘째는 병(病)굿 또는 우환굿, 그리고 셋째는 흔히 부모의 주15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진오기굿이다. 그러나 몇 가지 동기가 복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굿이 1년에 평균 100여 회 치러진다. 서울시내에도 이러한 굿당이 몇 군데 있는데, 최근 10∼20년 사이에 남산 밑 회현동의 노인성당과 불광동의 할미당, 자하문의 서낭당 등이 없어졌지만, 국사당은 1973년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참고문헌

『서울명소고적』(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9)
「국사당건물무신도 및 무구」(장주근·맹인재, 『민속자료조사보고서』40, 1972)
주석
주1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

주2

왕이나 왕세자의 혼례 때 왕비나 세자빈을 맞아들이던 궁전. 우리말샘

주3

다스리는 기록

주4

일제 강점기에, 서울 남산에 세운 신사. 1912년에 조선 신사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다가, 1925년에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국인에게 참배를 강요하였으나, 1945년 광복 이후 해체되고 소각되었다. 우리말샘

주5

정간(正間)의 좌우 양쪽에 있는 방. 우리말샘

주6

네모진 기둥

주7

가늘게 귀접이한 재목

주8

주로 대청과 방 사이 또는 대청 앞쪽에 다는 네 쪽 문. 여름에는 둘씩 접어 들어 올려 기둥만 남고 모두 트인 공간이 된다. 우리말샘

주9

문짝에 종이를 바르거나 유리를 끼우는 데에 뼈가 되는 나무오리나 대오리. 우리말샘

주10

작은 들보의 하중을 받기 위하여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른 큰 들보. 우리말샘

주11

안쪽으로 휘어 들어간 처마의 곡선. 우리말샘

주12

마룻대에서 도리 또는 보에 걸쳐 지른 나무. 그 위에 산자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13

기둥의 중간이 배가 부르고 아래위로 가면서 점점 가늘어지게 만드는 방법. 구조의 안정과 착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수법으로, 그리스를 비롯한 한국ㆍ중국ㆍ일본 등의 고대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말샘

주14

뛰어난 장인

주15

죽은 사람의 넋. 우리말샘

주16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벌여 놓는 상. 우리말샘

집필자
장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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