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당의 무신도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국사당에 있는 무속신의 화상(畵像)들이다. 무신도 21점, 명두 7점 등 28점이다. 무신도 가운데 12점은 조선 말기에 한 인물이 제작한 것으로 모두 비단에 채색을 하였다. 그림은 아태조(我太祖) 3점, 아태조비인 강씨부인, 호구아씨, 용왕대신, 산신님, 창부씨, 별상님, 무학대사, 곽곽선생, 단군, 삼불제석, 나옹님, 칠성님, 군웅대신, 민중전, 최영장군이 각 1점씩 있다. 이들 무신도는 무속의 복합적이고, 풍부한 신 관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1970년 3월 24일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970년 3월 24일에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무신도 21점, 명두 7점 등 모두 28점이며, 작자는 미상이다. 무신도 가운데 12점은 조선 말기에 같은 인물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모두 비단 바탕에 채색을 한 매우 우수한 그림들이다. 나머지는 후대의 것으로 질이 떨어져 보인다.
현재 국사당 무신도는 9매가 정면 벽에, 그리고 좌우 벽면에 각각 3매씩 모두 15매가 걸려 있다. 그림은 아태조(我太祖) 3점을 비롯하여 아태조비인 강씨부인(康氏婦人) · 호구(戶口)아씨 · 용왕대신(龍王大臣) · 산신(山神)님 · 창부씨(倡夫氏) · 별상님 · 무학대사(無學大師) · 곽곽선생 · 단군(檀君) · 삼불제석(三佛帝釋) · 나옹(懶翁)님 · 칠성(七星)님 · 군웅대신(軍雄大臣) · 민중전(閔中殿) · 최영장군(崔瑩將軍)이 각 1점씩 있다.
우측에서부터 벽에 걸린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로 57㎝, 세로 93㎝. 비단 바탕에 채색. 광대씨(廣大氏)라고도 한다. 창부는 예능신인 듯하나, 흔히 굿에서는 액을 막아주는 신으로 섬겨진다. 피리를 불며 줄을 타고 있는데,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자세가 현묘하게 그려져 있다.
가로 57㎝, 세로 93㎝. 종이 바탕에 채색. 재료 · 규격과 그림의 필치 등이 다른 무신도들과 다르며 격도 떨어져서,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보인다. 또한 그림 위에 쓰여 있는 글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곽곽은 『산해경(山海經)』과 『수경(水經)』 등의 저자이다. 또한 경학(經學)과 역수(易數) 등에 능하였다고 하는 중국 동진(東晉)의 학자 곽박(郭璞)이 점복업자들 사이에서 조상신처럼 모셔지면서 와음(訛音)되어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인다.
1972년 당시의 국사당 관리인에 의하면 곽곽선생은 맹인풀이의 대상신으로 주로 안질환자들이 신봉하였으며, 점괘를 내리는 데에도 정확한 신통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믿어졌다고 한다.
가로 57㎝, 세로 101㎝. 비단 바탕에 채색. 칼을 짚고 앉아 있는 무장상이다. 군웅대신 또는 최영장군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별상의 신격은 무당들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제주도의 무가 삼신본풀이 속에 ‘대별상 큰마누라’와 ‘홍진국 작은마누라’가 부부신으로 등장하는데, 전자는 천연두신, 후자는 홍역신이다.
이들 부부가 산속(産俗)에서 아이의 수호신인 ‘삼신할망’의 신력에 굴복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별상은 천연두신임을 알 수 있다. 호구아씨라든가 마마 등 홍역신의 존재는 분명히 인식되고 있는 반면, 천연두신의 존재가 불분명해진 것은 홍역이 아직 어린이들에게 무서운 병인데 반하여 천연두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로 60㎝, 세로 105㎝. 비단 바탕에 채색. 기호노인상(騎虎老人像) 뒤에 선도(仙桃)를 든 동자가 서 있다. 호랑이와 함께 산신은 언제나 성격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무당굿의 열두거리 가운데 산거리, 또는 상산거리에서 모시는 신은 최영장군이기 때문에 다소의 혼선이 있다.
가로 63㎝, 세로 104㎝. 비단 바탕에 채색. 별상 또는 군웅으로 보기도 한다. 군웅은 성격이 분명하지 않으며, 흔히 액을 막아주는 신으로 믿어진다. 제주도의 무가(巫歌)들에 의하면 군웅은 가문 · 가업의 수호신으로 모셔진다.
가로 65㎝, 세로 110㎝. 비단 바탕에 채색. 최일장군이라고도 부른다. 전국적으로 모시지만 특히 경기도 일대에서 주요한 신으로 신봉된다. 개성 덕물산(德物山)의 주신(主神)이다. 국사당에서도 무당이나 치성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신이다.
가로 62㎝, 세로 100㎝. 비단 바탕에 채색. 당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1929년에 원본이 소실되어 다시 그린 것이라고 한다. 호구아씨는 홍역신이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국사당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소녀신상 앞에 연지와 분 따위를 놓아 지저분하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현존 호구아씨의 전신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이 앞에는 작은 경대와 단골들이 바쳤다는 예단들이 놓여 있다.
가로 60㎝, 세로 104㎝. 비단 바탕에 채색. 바로 옆에 있는 아태조와 함께 ‘아태조 내외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왕비가 후궁이었다는 점을 보면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아태조가 아니라 “고려 공민왕상을 걸어 놓았다.”라고 되어 있어 강씨부인이 아니라 공민왕의 왕후였던 원나라의 노국공주(魯國公主)일 가능성도 있다.
가로 60㎝, 세로 104㎝. 비단 바탕에 채색. 그림이 위아래로 2점, 그 밑에 가로 32. 5㎝, 세로 40㎝의 조선 태조의 영정이 걸려 있다. 익선관(翼蟬冠)에 곤룡포, 그리고 앞가슴과 양 어깨에 용무늬가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밑에 걸린 영정은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조선 태조 영정의 사진판인 듯하며, 첫 번째의 그림도 1929년경에 이 영정을 모사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 그림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언급된 공민왕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것도 지금은 아태조라고 부른다.
가로 59㎝, 세로 104㎝. 비단 바탕에 채색.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언급된 국사당의 무신도 ‘본조승무학(本朝僧無學)’이 바로 이것이라고 추정된다.
가로 57㎝, 세로 104㎝. 비단 바탕에 채색. 제석은 산신(産神) · 수신(壽神) · 농신(農神) 등의 성격을 갖는다. 「제석본풀이」에 의하면, 귀한 집의 무남독녀 당금애기가 중의 아들 3형제를 낳은 것이 삼불제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제석거리에서는 무당이 고깔에 장삼 차림으로 사제(司祭)를 한다. 무속과 불교가 오랫동안 접합하여온 결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가로 63㎝, 세로 106㎝. 비단 바탕에 채색. 고려시대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고승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국사당의 무신도 중 하나로 언급되어 있다.
가로 59㎝, 세로 103㎝. 비단 바탕에 채색. 구름 문양 바탕 위에 7인의 도사가 그려져 있다. 칠성은 도교의 신이 수입된 것인데, 민간신앙에서도 수명(壽命)의 신으로서 뿌리가 깊은 존재이다.
가로 59㎝, 세로102㎝. 비단 바탕에 채색. 파도 무늬 위에 기룡남신상(騎龍男神像)이 그려져 있다. 산신상과 같이 이 용왕상도 용을 곁들여서 신격이 선명하다.
가로 72㎝, 세로 110㎝. 비단 바탕에 채색. 다른 무신도들과는 규격과 그림 수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더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당 관리자들이 민중전이라고는 하지만, 원삼에 족두리 차림의 주신과 그 아래쪽 좌우에 두 동녀(童女)를 배치한 것은 호구아씨 신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상이어서 호구아씨로 추정되기도 한다.
정면의 왼쪽 구석에 있는 소액자(32×24㎝)에 ‘단군천신(檀君天神)’이라는 글자가 있는 단군상이 걸려 있는데, 처음 한 글자는 불분명한 ‘□진재석인(□晋齋石印)’이라는 글자도 보여서 한말 대종교계의 인쇄물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밖에 당 왼쪽에 있는 온돌방에도 4매의 무신도가 걸려 있다.
당 관리자들은 그것이 금성대감 · 구눙님 · 원당대감 · 호구아씨들이라고 하나 마루에 걸린 그림들과는 격에 있어서 많이 떨어진다. 앞서 언급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국사당의 무신도에 대하여 공민왕 · 무학 · 나옹 · 지공(指空) · 맹자상(盲者像) · 소녀아상(少女兒像) 등 6매의 무신도 이름과 기타 제신상(諸神像)을 언급하였다.
이름이 밝혀진 6매 중에서 지금 남은 것은 무학과 나옹 2매이고, 공민왕이라 지적되었던 것은 그대로 있는 위에 아태조상이 더 걸렸는지 확실하지 않다. 소녀아[痘神: 호구아씨]상은 촛불에 타서 다시 그렸고, 지공상은 보이지 않는다. 맹자상은 위 ‘곽곽선생’의 원래 그림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제신상 중에서 화풍이나 재료들로 보아서 당시의 것이 그대로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광대씨 · 별상님 · 산신 · 군웅 · 최영장군 · 아태조비 · 삼불제석 · 칠성님 · 용왕의 9매에 무학과 나옹을 넣어서 11매로 보이며, 공민왕이나 아태조를 넣으면 12매가 되는 셈이다.
국사당의 무신도 가운데 조선 말기에 같은 작가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비단 바탕에 채색한 그림들은 준화원급(準畵員級) 수준의 격조 높은 그림이다. 이들 무신도는 무속의 복합적이고, 풍부한 신 관념을 구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또한, 위 무신도들 위에는 더러 명두들이 걸려 있다. 명두는 원형의 놋쇠 제품으로 규격들은 대소 각양이나 고대의 동경을 연상시키는 상징적 무구이다. 악기도 아니고 점구도 아니나, 사제(師弟) 무녀 간의 계승에서 제일 대표가 되는 증표이며, 선대 무녀의 사령(死靈) 상징물로도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