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는 모체(帽體)가 2단으로 턱이 지고 앞보다 뒤쪽이 높으며 뒤에는 매미날개 모양의 소각(小角) 2개가 윗쪽을 향해 달려있다. 모(帽) 위에는 앞면의 청사변(靑絲辮)이 뒷면의 두 절각(折角) 사이를 얽게 되어 있다. 겉감은 자색의 사(紗) 또는 나(羅)로 만든다.
원래 중국 기원이며 단령 위에 쓰는 관모이나, 애초의 발생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부터이므로 복두(幞頭)와의 차이는 불분명하다. 정식으로는 당태종이 삭망(朔望) · 시조(視朝)의 상복(常服) 관으로 제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당제(唐制)를 차용한 통일신라시대부터 착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나 확인할 수는 없다.
당제의 경우는 당태종의 착수포(窄袖袍)에 육합화(六合鞾)를 신은 화상이 있으나 그 때 관모의 형상은 사모(紗帽)이다. 당시는 평건책(平巾幘) · 절상두건(折上頭巾)과 통용하였다. 송대(宋代)에 와서는 절상건(折上巾) · 착포(窄袍) 시사(視事)의 복으로 오사모(烏紗帽)와 통용하였다.
익선관과 오사모는 그 제도가 같되 황제나 왕이 쓰는 익선관은 오사모의 양대(兩帶)를 위로 치켜올린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도 이 제도를 채용하여 왕의 상복은 오사고모(烏紗高帽), 즉 오사절상건(烏紗折上巾)에 착수(窄袖) 상포(湘袍)를 입었다. 대(帶)는 자라(紫羅) 늑백(勒帛)에 간수금벽(間繡金碧)하였다.
이 경우도 모대(帽帶)를 절상(折上)하였으므로 익선관이었다고 보아진다. 당시의 요제(遼制)도 상복으로 당의 제도를 따라 황제가 평건(平巾) 천집포란(穿執袍襴)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익선관을 말하는 것 같다. 그 뒤 원대(元代)의 몽고복(蒙古服) 채용에 이어 명나라가 들어서자 당송제(唐宋制)를 복구한 의제를 따랐다.
명나라는 1405년(永樂 3)에 오사모 · 절상건으로 하였다가 다시 익선관에 황반령(黃盤領 : 窄袖이며 前後에 각각 金盤龍을 하나씩 織成하였음.)을 입고 옥대를 띠고 피화(皮鞾)를 신었다. 명나라의 황태자복은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인데, 이를 익선관이라 하고, 친왕(親王) · 군왕(群王) · 세자도 같다고 되어 있다.
조선 국왕에 내린 익선관은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에 의하여 친왕복(親王服)을 보냈으므로 이 익선관이 조선 국왕의 상복관이 되었는데 아래에는 곤룡포를 입어 한말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 제도는 오사모와 같은데, 양대를 위로 꺾어 올리는 전통적인 관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