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裘衣)라고도 한다. 원래 한 대 지방에서 어한(禦寒)을 위하여 원시시대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그 형태는 목을 둥글게 하고 양 소매가 달렸으며, 길이는 무릎 밑까지 내려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초구(貂裘)·초복(貂服)이라는 낱말이 자주 나오고 있다.
그 형태는 자세하지 않으나 담비가죽[貂皮]을 구형(裘形)으로 이어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종실록≫ 2년 5월조에 “삼전(三殿) 외에 초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은 사치를 금하고 국민의 고생을 감하자는 것이나, 초복은 모든 부녀가 입는 것이며 그것은 규중의 일이니 능히 금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또 13년 6월조에는 “초피의 상의가 없는 자는 감히 문족회(門族會)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왕이 억제하였으므로 이 폐습이 그전 같지는 않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한 때 남녀 구별 없이, 특히 부녀자들이 애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초구의 제도는 점차 초피로써 포 전체를 안으로 받치는 것보다, 저고리나 배자(背子)의 안을 받치게 되었고, 이것은 현재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이 저고리는 ‘갖저고리’라고 하며, 그저 ‘초구’로도 통하고 있다.
함경도 지방에는 조선시대 말까지 소가죽 두루마기가 있었고, 제주도에는 한라산 사냥꾼들이 입던 개가죽 두루마기가 있었다. 제주도의 것을 피구(皮裘)·피의(皮衣)·갖두루마기라고도 하였는데, 현재 제주도 민속박물관에 그 실물이 남아 있다.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 耳溪集≫에는 함경도의 피의를 두고 읊은 시가 전한다. “붉은 개가죽을 몸에 걸치고, 날소가죽을 발에 신는다. 가죽옷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다 좋으이, 가죽신은 물에나 뭍에나 다 편하이. 남인들은 웃지 마소, 나의 소박한 우둔함을. 비단옷구슬신 백년도 못가네(赤狗皮身掛 生牛皮足穿 皮衣冬夏皆宜 革襪水陸俱便 南人莫笑我朴陋 錦衣珠履無百年).”
갖옷은 뒤에 천으로 만들어 갑옷[甲衣]의 내의(內衣)로 입게 된다. 이것으로 전통적인 갖옷 형태는 갑옷의 형태와 유사하게 되었으며, 전포(戰袍)로 전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것을 간편한 실내의(室內衣)로도 입었던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 볼 때, 장군 박신룡(朴信龍)의 전포는 그가 무인이므로 이를 답호(褡護)로 보기보다는 전포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것은 우리 나라 갑옷이 안에 생가죽 조각을 붙이므로 몸에 닿는 감촉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실내의로 입으면 소매도 길게 하여야 하고 그 옷감도 화려하게 하여야 하므로, 김덕원(金德遠)의 구의 같은 것이 되었으리라 믿어진다. 그러나 이 구의는 전통을 잇지 못하고 조선 말기에는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이는 우리 복식사를 위해서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