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에 세 차례의 큰 홍수를 겪고 난 이듬해인 1408년(태종 8) 윤12월에 설치되어, 2개월여 동안 도성내의 동쪽으로 흐르는 큰 개천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개거도감(開渠都監)이라고 하여 성산군(星山君)이직(李稷)과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을 제조(提調)로 삼아 전라도·경상도·충청도 3도의 역군을 모아 일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개천도감으로 바꾸고 제조를 더 두었으며, 감독관리도 증원시켰는데, 3도에서 모두 5만2800인이 동원되었다. 2월에 공사를 마치면서 이어서 도감은 행랑 짓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도감의 명칭을 행랑조성도감으로 바꾸면서 개천도감은 폐지되었다.
그 뒤로 개천도감은 다시 설치되지 않고 도성내의 개천을 치는 일은 도성수축도감 등에서 하다가, 1760년(영조 36) 준천사(濬川司)가 설치되어 개천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