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

진도 씻김굿 길닦기
진도 씻김굿 길닦기
민간신앙
개념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현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현상.
개관

무당의 성격 한계에 따라 무속의 성격이 결정된다. 무당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① 신(神)의 초월적인 힘을 체득하는 신병(神病)의 체험을 거쳐 신권화(神權化)한 사람이어야 한다. 평범하던 한 인간의 신병을 통하여 신을 체험하고 신의 영력을 얻어서 신과 교유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신병을 체험한 강신무(降神巫)는 신병을 신의 소명에 의한 종교현상으로 의식한다.

② 무당은 신병을 통하여 획득한 영통력을 가지고 신과 만나는 종교적 제의인 굿을 주관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굿은 무당들의 정통적인 종교적 표현이며 행위적 현상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 이유는 신병을 체험하여 영통력을 획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제의를 독경식(讀經式)이나 불교의식에 의존한다면 무당 본래의 제의인 굿과는 이질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③ 무당은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서 민간층의 지지를 받고 종교적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민간층의 종교적 지도자로 인정되기까지는 민간층의 종교적 지지에 의한 사회적 공인이 전제되며, 무당이 비범한 신권자로서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때만 가능하다.

④ 무당의 신앙대상 신은 신병을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산신·천신·칠성신·용신 등의 자연신, 또는 장군신·왕신 등이고, 무당이 소망을 비는 신앙의식인 굿은 이들 신을 대상으로 한다.

무당을 이렇게 규정지을 때 지역에 따라 나타나는 성격차이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무당의 갈래를 어떻게 정리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따른다. 현재 우리나라의 중·북부지역에는 신이 내린 강신무가, 남부지역에는 조상 대대로 혈통을 따라 계승되는 세습무(世襲巫)가 분포되어 있다. 세습무는 강신무로부터 분화되어 사회적으로 정착, 제도화하여 영력이 도태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무당을 정리하면, 일차적으로 중부와 북부의 전통적 강신무인 무당 박수류와 남부의 세습무인 호남의 단골, 영남의 무당, 제주도의 심방이 있다. 이차적 방계무로서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 선무당류와, 호남·영남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명두·동자 등이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중심으로 체계화된 종교현상이다. 국내 어느 지역에서나 행하여지는 무속의 기본제의로는 성주굿·삼신굿·지신굿·조왕굿 등 민가의 가신에게 기원하는 제의와, 서낭굿·당산굿 등 마을의 수호신에게 기원하는 제의가 있다.

특히, 굿의 제의순서는 민가의 가신으로부터 마을의 수호신을 거쳐 우주의 천신으로 이어지며, 일반 민간신앙을 집약, 체계화시키면서 무속의 굿은 진행된다.

따라서, 무속은 민간층의 종교의식이 집약된 것으로 한민족의 정신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생활을 통하여 생리화한 산 종교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민족의 기층적 종교현상인 무속을 한국의 종교사적 입장에서 보면,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한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조직적 형태의 종교현상은 무속이라고 하는 귀결점에 이른다.

무속에 관한 우리나라 최고의 기록은 신라 제2대 남해왕 때의 것으로 1세기 초가 되고, 최초로 들어온 외래종교로는 4세기 후반의 불교로 알려지고 있다. 즉, 무속에 관한 기록보다 불교가 들어온 것이 약 4세기 후의 일이다.

그리고 무(巫)가 일반 자연종교 현상 속에서 전문화한 신직(神職)의 종교적 지도자로 자리를 굳히기까지는 오랜 역사를 흘러 왔을 것이며, 또 무를 시베리아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등 미개원시민족의 샤머니즘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 무속의 역사적 배경은 청동기시대까지 소급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무속은 이렇게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의 아득한 상고대로부터 한민족의 종교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또 외래종교가 들어온 뒤로도 민간신앙으로서 한민족의 기층적 종교현상으로 전승되어 왔다.

역사

고대

① 신앙형태:중국으로부터 유교·불교·도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한국인의 신앙양상은 고대 무교라고 본다. 그 자료로는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 중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제천의례에 대한 기록들과,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주몽·혁거세 등의 시조신화에 반영된 신앙양상 등이 있다. 이 두 자료에 나타난 고대 한국인의 신앙의 내용은 다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천신강림과 산신신앙이다. 시조신화들은 하느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다는 천신강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느님의 아들이 내려오거나 하늘의 빛이 내려왔다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하느님이 내리는 곳은 산이요 숲이다.

단군신화에서 말하였듯이 그들은 곡식·생명·질병·선악 등 인간의 생사화복과 생산 일체를 주관한다. 그러므로 농사를 전후하여, 또는 전쟁이 있을 때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이 너무나 먼 존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에 강림하고 산에 은거하는 하느님의 아들, 곧 산신을 제사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이런 뜻에서 우리의 산신신앙은 애니미즘(animism)이나 산악신앙의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신앙의 연장이다. 산신은 한국무속의 대표적인 신위이다.

둘째, 인간의 승화와 곡신신앙(穀神信仰)이다. 종교는 거룩한 절대자와 속된 인간 사이의 관계를 기초로 형성된다. 그리고 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속된 자기를 부정하고 승화시킴으로써 거룩한 신령과 교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농경문화에 눈뜬 고대 한인들은 이러한 승화의 원리를 곡식의 씨앗에서 터득하였다. 곧, 땅 속에 죽어 없어졌다가 다시 새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곡신신앙이 그것이다.

곰은 빛 없는 굴 속에 은거함으로써 인간이 되었고, 알영(閼英)은 냇물 세례를 통하여 온전한 여인이 되었다. 천제를 드리던 고대인들은 또한 이러한 자기 부정의 죽음과 승화의 기술을 음주와 노래와 춤에서 터득하였다.

연일 밤낮으로 계속 음주가무를 함으로써 그들은 황홀한 탈아 입신(脫我入神)의 경지에 들 수 있었다. 이러한 엑스터시의 기술을 통하여 그들은 승화되고 거룩한 신령들과 직접 교제할 수 있었다.

셋째, 신인융합과 창조신앙이다. 한국의 신화와 의례의 핵심은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로 융합한다는 데 있다.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인간이 승화의 과정을 밟는 것은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하기 위한 것이다. 신화는 이것을 신과 인간의 혼인으로 묘사하였고, 제례는 이것을 음주가무로써 실현하려고 하였다.

음주가무가 초래하는 황홀경 속에서 그들은 신과 인간이 하나로 융합되는 것을 체험하였다. 신령은 자연과 인생의 지배자이다. 따라서, 인간은 신과의 직접 교제인 융합을 통해서 인생문제를 해결하고 소원성취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화는 하느님과 땅의 인간의 결합에서 시조가 탄생되고, 그 시조가 나라와 문화를 창조하였다고 전한다. 고대인들이 주기적인 제천의식을 가진 것은 바로 이러한 신화적 창조작업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농사를 전후하여, 그리고 전쟁시에는 음주가무에 의한 제천의식을 가졌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서 볼 때 고대의 신앙양식은 무교적 구조와 일치된다. 곧 노래와 춤에 의한 제례(엑스터시의 기법)로써 신령과 직접 교제를 나누고, 이를 통하여 화복을 조절하고 인생문제를 해결하려는 주술적 종교현상이 바로 고대인의 신앙세계였다.

② 전개유형:고대 무교는 5세기경부터 중국에서 전해온 유교·불교·도교 등과 교섭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교는 위의 3교를 매개로 전승되며 또한 전개되어 갔다. 그런데 무교의 전승 또는 전개에는 대체로 세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 흐름이 있었다.

첫째, 단순전승이다. 곧 외래종교문화에 거의 구애됨이 없이 옛 무교의 모습이 그대로 전승되어 간 흐름이다. 물론, 문화적으로 우세한 다른 종교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오는 동안에 그 종교의 용어나 개념 등을 받아들이는 등 다소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9세기경 신라 말의 불안기에는 개인의 안전과 평안을 찾아 벽사진경(辟邪進慶)을 목적으로 한 개인의 굿이 유행하기 시작함으로써 종래의 집단적인 굿과는 다른 양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는 고대의 무교 원형을 그대로 전승해갔다. 그 잔류현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오늘의 민간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무속이다.

둘째, 종교습합적인 전승이다. 무교와 외래종교와의 습합을 통하여 전승되어가는 흐름이다. 그런데 그 습합 양상을 보면 외형적으로는 다른 종교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무교를 계승하고 있다.

그 예로 불교가 지배하던 신라나 고려시대의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외형적으로 볼 때 불교의 법회에 속하는 행사들이다. 즉, 불교 전통에 의하여 이 행사는 금욕적인 재회와 등공양을 하는 법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실천된 팔관회와 연등회는 주연을 베푸는 축제였다. 말하자면 예로부터 내려오던 무교적인 제천의식의 전승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현재까지도 기성종교의 저변에 무교가 서식한 채 전승되어 오고 있는 현상을 통하여서도 볼 수 있다. 사찰에 있는 산신·칠성·독성의 삼신신앙(三神信仰)은 대표적인 현상의 하나이다.

셋째, 승화적 전개이다. 이것은 외래 고등종교를 매개로 무교 자체가 승화된 가운데 새로운 종교사상운동을 전개하여 간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라시대의 화랑도나 조선시대 말의 동학운동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노래와 춤으로써 신령과 교제하여 인생문제를 해결하려던 무교는 유·불·선 3교를 매개로 높은 문화적 차원으로 승화되었다. 노래와 춤은 문화적 풍류로, 풍요와 평강의 생존적 가치로, 도의(道義)의 초생존적 가치로, 자연을 지배하던 신은 포함삼교(包含三敎)하는 문화적 신으로 각각 승화되었다.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6세기의 화랑도이다.

천주를 우리 속에 모심으로써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그의 뜻을 따라 병든 세상을 구제하려 하였던 동학은 신인융합에서 인생문제를 해결하려던 옛 신앙의 승화된 종교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오늘에도 우리나라의 신종교운동들 가운데서 가끔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고려

고대 한인의 집단적인 제천의식은 수호와 풍작을 비는 일종의 농경의례였다. 이것이 신라시대부터는 분화되어 산천제나 기우제 등으로 행하여졌다. 이러한 단순전승의 전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도 계승되었고 오늘날 촌락제나 동제의 양상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집단적 무교제례는 큰 변동 없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는 무속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개인적인 굿 또는 무당이 개입한 제의의 역사가 구체화된 시기이다. 개인의 양재초복(禳災招福)을 목적으로 한 무격신앙(巫覡信仰)의 출발은 신라 말기부터로, 9세기 말 헌강왕 때의 처용랑(處容郎)전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곧, 노래와 춤으로써 열병대신을 몰아낸 처용랑을 무당의 시조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 고려 초기 100여 년이 지나기까지 무당굿에 관한 언급은 없다. ≪고려사≫에서 무 격에 대하여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현종 12년(1021)부터이다. 이때 무당을 모아 기우제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 뒤 다시 100여 년에 걸쳐 무격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예종 16년(1121) 무당을 모아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사가 다시 나타난다. 그 뒤부터 무격에 대한 기사는 빈번해진다.

이로써 미루어본다면, 우리나라에서 무속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인종 때 이후라고 볼 수 있다. 곧 고려왕조가 혼란과 쇠퇴기로 접어들기 시작한 12세기부터 무격신앙은 크게 성행하였다. 인종 때 성행한 기우제는, 때로 무녀 300여 명을 모아 비가 오길 빌었다고 한다.

당시의 무풍의 성행을 말해 주는 기록이 ≪고려사≫ 세가편(世家篇) 인종 9년 8월조에 수록되어 있다. 즉, “일관이 알리기를 ‘근래에 무풍이 크게 성행하고 음사(淫祀)가 날로 성하니 청컨대 유사(有司)들로 하여금 무당의 무리를 멀리 내쫓도록 하소서.’ 하자 왕은 그것이 옳았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성중에 무격음사가 날로 성하니 그들을 성 밖으로 이사하게 하자고 대사국(大史局)에서 청원한 일이 1298년(충렬왕 24)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무격신앙은 고려 말까지 계속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양왕 때의 김자수(金子粹)가 올린 상소문 속에는 “나라에 무당(巫堂)을 세우고, 별기은(別祈恩)을 행하는 곳이 여러 곳에 있어 무당들이 떼를 지어 국행굿을 하느라고 많은 비용을 쓰니 금하라.”는 구절이 있다.

나라에서 공공연히 국무당(國巫堂)을 세우고 무당들로 하여금 별기은제를 드리게 하는 무풍이 고려 말까지 성행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무당과 그 기능, 굿의 양상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격과 강신:무당이 되는 것은 그에게 신이 내림으로써 이루어진다. 충렬왕 때 장성현(長城縣)의 한 무당은 “금성대왕(錦城大王)이 내게 강신하여 말하기를, ‘네가 금성신당의 무당이 되지 않으면 내가 반드시 너의 부모를 죽이리라.’ 하므로 나는 두려워서 이에 따랐다.”고 한 기록이 ≪고려사≫에 전한다. 즉, 사람이 무당이 되는 것은 신이 내림으로써 될 뿐만 아니라 무신의 강요에 못 이겨 무당이 된다는 것이다.

신이 내리는 데는 남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충선왕 때 내부령(內府令)을 지냈고 충숙왕 때에 찬성사(贊成事)가 된 강융(姜融)의 누이는 무당이 되어 송악사(松岳祠)에 기식하였고, 공민왕 때 판숭경부사가 된 지윤(池奫)의 어머니도 무당이었다.

명종 때는 남자무당이 여장을 하고 사족들의 집을 드나들며 부녀자들을 문란하게 하였다는 기사도 있다. 이는 모두 고려시대에도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신이 내리면 무당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입증하는 기사들이다.

② 무당의 기능: ≪고려사≫의 자료에 의하면 무당의 기능은 대체로 다음의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사제적 기능이다. 무당이 관여하고 있는 가장 많은 기사가 기우제에 관한 것이다.

무당은 기우제를 주관하는 일종의 사제였다. 또한, 명종 이후 명산대천을 찾아 왕실의 축복을 비는 별기은제가 있었는데 이를 주관하는 이가 곧 무격들이었다. 그들은 음주가무로써 제사지내는 사제자들이었으며, 이것은 곧 고대의 천군(天君)이나 아로(阿老) 등의 사제직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둘째, 무의적 기능(巫醫的機能)이다. 무당이 지닌 치병의 기능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인종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점쟁이가 “그것은 모반으로 처형된 이자겸(李資謙)의 탓”이라 함으로써 그의 처자와 자손을 우대하였고, 다시 무당의 말을 따라 내시를 파견하여 김제군에 신축한 벽골지(碧骨池)의 둑을 헐게 하였다.

왕의 병이 원한을 품고 죽은 영이나 막힌 수로의 원한에 있다고 믿고, 그 원령들을 풀고 위로하는 것이 치료의 길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치병행각은 왕실에 그치지 않고 일반 서민들에게도 보편화된 현상이었다. 송나라의 서긍(徐兢)도 “고려는 본래 귀신을 믿고 음양을 구기(拘忌)하며, 백성들은 병에 약을 먹지 않고 다만 귀신을 섬기며 주저(呪咀)를 일삼을 뿐이다.”고 하였다.

셋째, 예언적 기능이다. 무당이 지닌 기본적 기능의 하나는 예언점복이었다. 의종 때 등주(登州)의 서낭신이 종종 무당에게 내려 국가의 화복을 기이하게 맞추었고, 공민왕 때도 신이 무녀에게 내려 말하기를, “지금 나라에는 요사스러운 일이 많은데 이것은 망조가 나타남이라.”고 하였다.

넷째, 사령저주(使靈咀呪)의 기능이다. 악령을 구사하여 남에게 해를 주고 병이 들게 하는 저주법은 특히 고종 이후에 성행하였다. 질투 때문에 무당을 시켜 공주를 저주, 무고(巫蠱)하는 일은 충렬왕·충선왕 때 종종 기록되고 있다.

다섯째, 가무의 기능이다. 무교는 본래 노래와 춤으로써 신령과 교제하는 종교이다. 이러한 가무가 점차 발전하여 무당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로 독립되기도 하였다.

③ 무의(巫儀): ≪동국이상국집≫에는 12세기경의 굿의 양상을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한 편의 장시가 있다. 이 시는 이규보(李奎報)가 자기 집 가까이 있던 늙은 무녀가 추방당하는 것을 기뻐하면서 지은 것이다. 그 가운데는 굿하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굿하는 장소는 신단이 있는 방 안이다. 벽에는 화분[巫神圖]을 그려 붙여 놓았으며, 무당이 춤출 때는 머리가 대들보에 닿을 듯한 곳이었다. 둘째, 신당에 모신 주신은 제석신이다. 그리고 벽에는 칠성님의 무신도가 걸려 있고 신상들은 모두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셋째, 무당이 굿하는 절차는 술 마시며 껑충껑충 뛰는 춤으로 진행되었다. 요란스러운 장구 소리에 맞추어서 머리 끝이 대들보에 닿을 듯하였다.

넷째, 노래와 춤을 통하여 신이 내린 다음에는 신탁을 전하는 공수 절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생사화복을 점치고 처방하는 일이었다. 다섯째,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굿당에 가득히 모여들어 굿을 하였으며, 그들은 금품을 무당에게 바치고 있었다.

이로써, 고려시대 무당과 굿은 오늘날 볼 수 있는 무속과 매우 비슷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록은 오늘날의 무당굿의 형태가 이미 12세기경에 정형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

고대의 제천의식은 농사와 관련되어 농경의례를 겸하게 되었다. 그 뒤 신라와 고려시대는 산천제·기우제 등으로 분화되면서 전승되어 왔다. 음사를 배척하던 유교주의국가였던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공동제의만은 그대로 허용되었다.

특히, 고려 중엽부터 서낭제라는 명칭으로 불려오던 산신제의 일부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행관제(國行官祭)나 일반 민중의 촌락제로도 성행하기에 이르렀다. 이규경(李圭景)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성황당은 고대로부터 있었던 제천의식이나 산신제의 유속인 서낭당을 중국의 성황(城隍)이라는 명칭을 따라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 무속의 주류 또한 무격신앙이었다. 고려시대 중엽부터 활발하게 된 무격신앙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성행하였다. 민중의 신심을 모으고 있던 불교를 배척한 유교주의정책은 결국 민중을 무격신앙 일변도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이상과 실제에 있어서 조선왕조의 종교정책은 이율배반을 낳게 되었다.

음사를 금하는 법령을 정하고 무격을 성 밖으로 추방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국무당을 세우고 무격을 동원하여 기우제·서낭제 등을 행하였다.

궁중 나례(儺禮)에는 무녀·광대 등 무격집단을 동원하여 이를 집행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공 의료기관인 성수청(星宿廳)이나 활인서(活人署)에는 의생과 함께 무격을 두어 민중의 구병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공공연하게 무업세(巫業稅)를 징수하기까지 하였다.

유신(儒臣)들에 의하여 무속은 사도라 하여 금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민중의 신앙과 생활철학을 지배해 온 것이 조선시대의 실정이었다. 외형상으로는 유교주의 국가였으나 종교적으로는 무교에 의하여 지배되는 이중구조를 가진 것이 조선시대의 한 특성이라 하겠다.

① 무풍의 성행과 특성:조선시대에는 무격신앙이 성하지 않은 시기가 거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하여 본 시대적·지방적 특색을 지적한다면, 첫째, 임진왜란 전인 15, 16세기에는 산천제·서낭제·기우제 등 공동제의가 성행하였으나, 임진왜란 뒤인 17, 18세기에는 치병이나 개인적인 저주를 푸는 등의 개인제례로서의 굿이 성행하였다.

둘째, 지역적 특색을 든다면 함경도와 강원도에서는 서낭신앙이 성행하였고 전라도에서는 오락적인 무희(巫戱)가 발전하였으며, 정치적 알력 속에서 지내야 하였던 서울에서는 저주가 발전하였고, 대륙과의 통로였던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는 구병제가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의 무풍 성행에 대하여도 몇 가지로 유형을 나눌 수 있다. 첫째, 궁중의 무속이다. 태종 18년(1418) 성녕대군(誠寧大君)이 연두창으로 죽게 되자 형조(刑曹)는 국무당 가이(加伊)와 무녀 보문(寶文)이 병화를 다스리지 못한 데 대하여 힐책하였고, 세종 2년(1420) 6월 대비의 병이 악화되자 무당으로 하여금 신에게 제사하도록 하였다.

연산군 때는 궁중에서 무녀들이 모여 앉아 굿하는 것이 매우 빈번하였으며, 중종 10년(1515) 국무당 돌비(乭非)가 궁중을 드나들며 굿을 하였다. 임진왜란 뒤 특히 궁중여인들 사이에 질투와 시기가 심해지면서 서로 무당을 시켜 저주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숙종 때 장희빈(張禧嬪)과 궁중무의가 행하였던 저주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19세기 말에도 민비(閔妃)는 굿을 좋아하여 나라의 굿이 끊이지 않았다.

둘째, 무격을 관할하는 관공서가 있었다. 태조 때부터 동서에 두 활인원(活人院)을 두어 이에 소속된 무당들로 하여금 전염병의 치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잠시 중단되었을 뿐,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있었던 공적 의료기관이었다.

셋째, 민중들 사이에 성행한 무속이다. 조선시대의 민중 사이에서 성행하였던 무풍에 관하여는 그 폐단을 탓하는 신하들의 상소문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세종실록≫의 세종 11년 9월조에 “지금의 세속은 구습을 따라 무격의 요사하고 허탕한 말에 미혹되어 이를 높이고 신앙하니, 어떤 때는 집에서, 어떤 때는 들에서 음사를 행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서민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습속이 되어 떳떳이 행하고 있으니…….”라고 하였다.

≪성종실록≫의 성종 9년 11월조에는 “요새 사람들은 다투어서 귀신을 믿습니다. 범사의 길흉화복을 한번은 무당에게 들어봅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중종실록≫의 중종 9년 11월조에는 “한 사람이 노래하면 만인이 이에 화답하고, 가까운 데서 장구를 치면 먼 곳에서 이에 응답하며, 서울의 주민들 사이에는 신사가 방장하여 밤낮이 없이 굿을 자행합니다.

신들이 두려운 것은 위에서 음사를 좋아하는 까닭에 아래에서는 더욱 심하며, 사도가 승하여 말류에 해가 오는 것입니다.”라는 상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성행한 무격신앙은 많은 폐해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부터 무당굿을 금지하고 무격을 성 밖으로 추방하기도 하였지만 10세기에 이르기까지 무속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② 무 격:조선시대 무당의 칭호를 보면 여자는 흔히 무녀라 하였고, 성종 때는 현수(絃首)라고도 하였다. 연산군 때는 성수청에 있는 국무를 도무녀(都巫女)와 종무녀(從巫女) 등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그리고 특히 신의 소리를 내어 신탁을 말하는 무녀를 공창(空唱)이라 하였으며, 때로는 태자무(太子巫)라고도 불렀다. 남자무당은 흔히 화랑·낭중·양중(兩中) 등으로 불렸다.

궁을 출입하는 무당이나 활인서 또는 성수청과 같은 관공서에 소속된 무당들은 국무(國巫)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방 촌읍 수령의 아내(衙內)를 출입하는 무당은 아무(衙巫)라고 하였다.

한편, 관무를 국무라고 한 데 대하여 지방관청에서 주관하는 무당은 내무녀(內巫女) 또는 내무당이라고 하였다. 신이 내리면 무당이 된다는 것은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강신하면 무당이 되게 마련이었다. 세종 때 집현전 제학(提學)의 어머니도 무당이 되었다.

무격은 고대로부터 사제자·구병자, 점복하는 예언자로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고려시대에 와서는 영들을 구사하여 길흉을 조작하려는 사령자(使靈者)로서의 기능이 발전되었고, 한편으로는 노래와 춤 그리고 잡이[樂工] 등으로서도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기능들을 이어받고 그대로 발전시킨 것이 조선시대의 무격들이었다.

③ 굿:무격이 각종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굿을 통해서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 나타난 굿의 종류와 양상을 살펴보면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 기복제(祈福祭)이다. 공동제례인 산천제나 서낭제는 일종의 기복제이다. 특히, 기은(祈恩)이라 하여 왕가의 안녕과 다복을 산천과 서낭신에게 빌었다. 이것은 별기은(別祈恩)이라고도 하여 고려 말기부터 성행하였는데, 공양왕 때는 국무당 열 곳을 세우고 거기에서 무객들이 고취가무(鼓吹歌舞)로써 별기은제를 행하였다.

조선 초기의 태종 때는 송악·백악·감악산 등지에서 봄·가을로 기은제를 지냈고, 또다시 별기은이라 하여 제를 지내니 이것이 겹친 행사가 아니냐고 예조(禮曹)가 계(啓)를 올린 일도 있다. 그러나 왕은 “별기은을 행해 온 지 오래이므로 이제 와서 폐지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하고 그대로 계속하게 하였다.

중종 때의 기록에 의하면, 기은은 왕의 장수연명을 비는 것이므로 의장을 엄히 하여 창우 무격을 거느리고 전당에서 복을 빌기도 하고, 무녀를 이끌고 산천이나 서낭에서 복을 빌기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은제를 음사라 하여 때때로 혁파하려고 하였지만, 결국은 조선시대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기복제는 왕실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대부나 서민들도 귀신을 섬기며 무격을 믿고 산천·서낭에 제를 지냈으며, 이를 기은 또는 반행(半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점차 민중의 기복 산신제인 촌락공동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구병제(救病祭)이다. 예로부터 무격이 지녔던 최대의 기능은 치병에 있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병은 귀신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구병은 귀신과 교제하는 무당들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무당이 사는 집에는 역신이 범접 못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병(避病)이라 하여 열병이 돌 때 무당의 집에 기숙함으로써 역신의 범접을 피하려고 하였다.

세종 때는 동서활인서의 무격들로 하여금 각리각호(各里各戶)를 분장하게 하고, 열병이 돌 때 의생과 함께 이를 치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염병이 돌 때는 무당들을 동원하여 무사귀신(無祀鬼神)과 역신(疫神)을 제사하는 여제(厲祭)를 지내게 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전염병을 흔히 열병이라 하였다. 그 중에도 두려운 것이 천연두였다. 이 병을 가져오는 두신(痘神)을 특히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고, 천연두에 걸리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다.

셋째, 사령제(死靈祭)이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의 영을 위안하기 위하여 위령제를 지내는 법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사령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기능은 단순한 위령이 아니라 죽음의 살(煞)을 푸는 살풀이를 하여 망령을 저승으로 보냄으로써 후환이 없도록 하는 데 있었다.

특히, 병으로 죽거나 억울하게 한을 품고 죽은 원령들은 남에게 화를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령제는 뜰에서 행하였기 때문에 이를 흔히 야제(野祭)라고 하였다.

현황과 구조

무의 유형과 지역적 특징

우리나라의 무속은 중·북부지역과 남부지역이 성무동기(成巫動機)·신관·제의의 세 부분에서 각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세 부분은 어느 것이나 다 서로 유기적인 연대성이 있는 것으로서, 성무동기에 따라 신관이 결정되고 신관에 따라 제의의 양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들 셋을 결정짓는 주요인은 성무동기로 집약시켜 볼 수 있다.

중부지역과 북부지역의 무당은 강신체험을 통해서 무당이 된 강신무가 지배적인 데 비하여, 남부지역은 혈통을 따라 무당의 사제권이 세습하여 계승되는 세습무가 지배적이다. 성격상으로도 지역에 따라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강신무는 성무동기가 강신으로 인한 신의(神意)에 있다고 스스로 믿으며, 무의 주된 기능 또한 강신으로부터 얻은 영력이다. 세습무는 성무동기가 사제권의 인위적 세습인 동시에 무의 주된 기능이 영력과는 관계 없이 제의를 집행하는 사제권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남부지역에도 ‘명두’와 같은 강신무 계열이 분포되어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계일 뿐 남부지방 무당의 주류는 아니다. 또한, 제주도의 심방(무당)은 세습무이면서 영력을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에, 호남지역의 세습무인 ‘단골’이나 영남지역의 세습무인 ‘무당’과는 성격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고 세습무와 강신무의 중간형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부와 북부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무당형은 ① 강신체험에 의하여 영력을 가지고 있고, ② 강신한 ‘몸주’신과 그 몸주신을 모신 신단이 있으며, ③ 신관이 구체화해서 신의 실재를 확신하며, ④ 가무(歌舞)로 정통 굿을 주관하는 사제인 동시에 영력에 의하여 점을 친다.

단골형은 호남의 ‘단골’과 영남의 세습무 ‘무당’이 이 유형에 해당되는데, 단골형은 ① 혈통에 의한 사제권의 세습, ② 사제권에 의하여 일정 지역의 관할권인 단골판이 계승되고, ③ 강신체험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신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고 자가의 신단이 없으며, ④ 신을 향하여 일방적인 가무로 정통 굿을 주관하는 사제이다.

제주도에 분포되어 있는 심방형은 ① 혈통에 의한 사제권이 세습 제도화되고, ② 영력으로 인한 신의 인식이 확고하여 구체화된 신관이 확립되어 있으나 자가의 신단은 없으며, ③ 직접적인 강신영통이 없이 매개물인 무점구(巫占具)를 통해서만 신의 뜻을 물어 점을 칠 수 있고, ④ 신을 향하여 일방적인 가무로 정통 굿을 주관하는 사제이다.

명두형(또는 맹두형)은 죽은 아이의 영[死兒靈]의 강신체험을 통해서 된 무인데, 이 죽은 아이의 영은 혈연관계가 있는 아이의 영이다. 여자아이의 영이 내린 무를 ‘명두’, 남자아이의 영이 내린 무를 ‘동자’ 또는 ‘태주’라고도 한다.

이 유형의 무는 중부와 북부지역에도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나, 특히 호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영남지역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이 명두형의 특징은 ① 죽은 아이의 영이 강신되어, ② 영에 의하여 점을 전문으로 하는 점쟁이이며, ③ 초령술(招靈術)을 가지고 있으나, ④ 가무로 정통 굿을 할 수는 없다.

무당형과 명두형은 강신에 의한 영통력이 주기능이기 때문에 강신무 계통으로 분류되고, 단골형과 심방형은 양자가 모두 사제권이 제도적으로 세습되면서 제의의 사제가 주기능이 되기 때문에 세습무 계통으로 구분된다.

제의면에서 볼 때 중·북부지역 강신무의 굿과 남부지역 세습무의 굿에서도 차이가 있다. 강신무가 굿을 할 때는 신이 내려 무와 신이 합일해서 제의형식이 일원화되지만, 세습무는 굿을 할 때 신을 향하여 기원하는 일방적인 사제로서 신과 무가 대치된 이원화현상을 보인다.

또한, 세습무는 굿의 의식절차가 강신무보다 체계화된 데 반하여 신복(神服)을 상징하는 무복(巫服)의 수가 극히 적거나 거의 없는 편이지만, 강신무는 영력 위주여서 세습무의 굿에 비하여 의식절차가 유동적인 편이며, 무복의 수가 많고 화려한 편이다.

또, 무악(巫樂)에 있어서도 강신무는 타악기 위주이고 세습무는 타악기에 현악기가 첨가되어 있으며, 춤에서도 강신무는 단조로운 춤에 도무(跳舞) 위주이고, 세습무의 춤은 극히 예능화하여 영남지역의 경우 1∼6장으로 춤이 다양하다.

제의

① 제신(祭神)과 제의장소:무속제의에서는 가신(家神)·동신(洞神)·외계신(外界神)의 3부 신이 기본적 제신이 되며, 제의의 규모가 커지는 큰 굿일수록 외계신이 다양하게 동원된다.

가신과 동신은 기본적 제신으로 별 변동이 없으나, 규모가 큰 굿일 경우 외계신과 함께 동신이 더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 무속에서는 민간인들의 생활현장인 가정과 마을 밖을 ‘외계’라고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외계에 존재하는 신을 외계신이라 부른 것이다.

각 지역 무속에서 제를 받는 3부의 가신·동신·외계신 중 공통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신들이 있다. 가신으로는 조왕신·삼신·지신·성주신·조상신·대감신·업신·정신(井神)·우마신(牛馬神)·문신(門神) 등이 있고, 동신으로는 산신·서낭신·부군신·당신(堂神) 등이 있으며, 외계신으로는 천신·천왕신·칠성신·시준신·제석신·용신·용왕신·장군신·군웅신(軍雄神)·신장신(神將神)·손님신·창부신(倡夫神)·잡귀(雜鬼) 등이 있다.

제의장소는 가제와 동제가 각각 다르다. 가제는 중부지역의 경우 대청에다 제의장소를 정하는 것이 통례이나 대청이 없는 집은 안방을 제의장소로 사용한다.

호남·영남·제주도 등지에서는 집안 뜰(안마당)에 차일(遮日)을 치고 그 밑에다 굿상을 차리고 제의를 하는 것이 통례이다. 중부지역 도시의 경우 제의장소가 마땅하지 않으면 굿당을 찾아가 제를 올리거나 무당의 집 신단(神壇)에서 제를 하는 예도 있다.

마을 공동제의인 당굿의 경우는 동신을 모신 당 앞에 제의장소를 정하고 제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다. 동제를 올리는 당은 신수(神樹)만 있거나 신수 밑에 석단(石壇)이 있거나 신수와 당집이 있는 세 가지 형태가 통례이다.

이 밖에 암석이나 산정이 제의장소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당집 형태의 경우 그 사우(祠宇) 안의 제단에서 제의를 올리고, 사우가 없이 신수나 암석만 있는 경우 그 앞에다 제장을 꾸미고 제의를 한다.

② 종류와 목적:무속의 제의는 제의규모에 따라 ‘굿’과 ‘비손’으로 구분된다. 굿은 여러 명의 무당과 무악(巫樂)을 전문으로 하는 ‘잡이’가 협력하여 가무와 실연(實演)을 위주로 제의를 하는 것이고, 비손은 한 사람의 무당이 축원을 위주로 하는 약식 제의이다.

가무를 중심으로 서서 제의를 진행시킨다 하여 전자를 ‘선 굿’, 앉은 채로 가무 없이 무당이 축원 중심으로 제의를 진행시킨다 하여 후자를 ‘앉은 굿’이라 하기도 한다. ‘비손’은 지방에 따라 ‘손빔’ 또는 ‘비념’이라고도 한다.

동제인 당굿과 같이 규모가 큰 제의는 당연히 굿으로 제의가 진행되어야 하지만, 기자·치병·재수·발원 등의 제의는 비손이나 굿, 어느 형식이든 가능하다. 제의 규모의 비중에 따라 비손 형식으로도 할 수 있고 굿으로도 할 수 있으며, 그 비중 여하에 따라 작은 굿과 큰 굿 어느 쪽으로든지 제의가 가능하다. 따라서, 제의내용에 의한 목적을 전제로 하여 각종의 제의가 존재한다.

현재 전국 각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속의 제의종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무신제(巫神祭)에는 무당 자신의 제의인 강신제(降神祭)와 봄·가을에 주기적으로 하는 축신제(祝神祭)가 있다.

강신제는 무당에게 내린 신을 받아서 무당이 되는 성무양식이고, 축신제는 해가 바뀔 때마다 신의 영력을 주기적으로 보강시켜 무당의 신통력을 강화시키는 제의로 볼 수 있다. 강신제로는 내림굿·신굿·명두굿·하직굿 등이 있고, 축신제로는 꽃맞이굿·단풍맞이굿·진적·대택굿 등이 있다.

가제(家祭)는 민가에서 가족의 안녕과 행운을 위해서 하는 제의로 생전제의와 사후제의로 나눌 수 있고, 또 생전제의에서도 해가 바뀔 때마다 하는 주기제(週期祭)와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서 하는 수시제로 구분된다.

생전제의에는 기자 및 육아기원제의(育兒祈願祭儀)로 겜심바침·산신맞이·삼신맞이·지앙맞이·삼제왕풀이·삼신풀이·불도(佛道)맞이·칠성제 등, 치병기원제의(治病祈願祭儀)로 병굿·환자굿·푸닥거리·영장치기·산거리·중천굿·명두굿·별상굿·맹인거리·광인굿·손풀이·푸다시·마누라배송(拜送)·비념·사제맥이 있다.

그 밖에도 혼인축원제의(婚姻祝願祭儀)로 여탐·근원손, 가옥신축(家屋新築) 또는 이사제의(移徙祭儀)로 성주맞이·성주풀이, 행운·기풍제의(祈豊祭儀)로 재수굿·영화굿·축원굿·성주굿·도신굿·논부굿·치방굿·씨앗고사·맹감풀이·일월맞이·안택(安宅)굿·큰굿·산신풀이·고사·액맥이, 해상안전과 풍어기원제의로 연신·요왕맞이 등이 있다.

사후제의(死後祭儀)에는 상가정화(喪家淨化)·망인천도제의(亡人薦度祭儀)로 자리걷이·집가심·곽머리·댓머리·귀양풀이, 익사자천도제의(溺死者薦度祭儀)로 물굿·수망(水亡)굿·혼굿·혼건지굿, 망인천도제의로 지노귀·천근새남·지노귀새남·오귀자리·망무기굿·수왕굿·오귀굿·해원굿·시왕(十王)굿·다리굿 등이 있다.

또한, 동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에게 해가 바뀔 때마다 봄·가을로 날을 잡아 제를 올리는 주기적 제의로서, 내륙지방의 제액과 기풍제의인 당굿·도당굿·서낭굿·부군당굿·별신굿 등과 해안지역의 제액과 풍어제의인 풍어제·용신굿·연신굿·서낭풀이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무속의 제의는 그 목적에 따라 13종의 제의가 전승되고, 가제 속에는 인간의 출생으로부터 혼인·사망에 이르는 통과제의(通過祭儀)가 그 저변에 깔려 있다.

그리고 해가 바뀔 때마다 계절에 따라 주기적으로 거행되는 무가(巫家)의 축신제, 마을의 동제, 민가의 제액초복(除厄招福)을 위한 안보제의류는 민간인들이 그들의 생활현장을 주기적으로 정화시켜 나가는 삶의 제의로 볼 수 있다.

③ 제의의 구성:무속의 제의는 비손과 강신무의 굿과 세습무의 굿으로 나눌 수 있다. 비손은 축원 등의 언어위주 형식이며, 강신무의 굿은 무당이 신의 행동을 모방 실연하고 무당이 신격화하여 무당과 신이 합일하는 일원적 행동위주 형식이다.

세습무의 굿은 신의 행동을 모방 실연하되 무당이 영력이 없어서 신격화되지는 않으며, 무당과 신이 대좌관계에 있는 이원적 행동위주 형식이다. 따라서, 무속의 제의는 언어위주 형식, 일원적 행동위주 형식, 이원적 행동위주 형식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이, 형식은 세 가지로 구분되지만 그 제의의 진행과정은 택일과 금기-청신(請神)-대접·기원-송신(送神)-금기로 공통된다. 여기서 택일과 금기는 신을 청해 오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에 따르는 것이므로 청신에 종속시켜 볼 수 있고 끝의 금기도 신성과 관련된 것이므로, 다시 분류하면 청신-대접·기원-송신의 3단계로 구성된다.

사고체계

무당이 되는 시초에 신병을 통하여 내리는 신의 체험은 무당의 신관·우주관·영혼관·내세관을 구체화시키고, 이렇게 체계화된 사고는 언어로 표현되어 무가로 형상화된다. 인위적 세습에 의한 세습무일수록 신관을 비롯한 우주관·영혼관·내세관이 희박하고, 무가도 일정한 양식으로 격식화된다.

신관

무속의 신관은 다신적 자연신관(自然神觀)이며, 신의 실재를 믿어 신이 만물 존재 운행의 전능자라 믿는다. 무속에서 신앙하는 신은 자연신계통과 인신(人神)계통인데 전국적으로 조사, 집계된 무신은 273종이다.

이를 계통적으로 분류하면 자연신계통의 무신은 천신계통·일신계통·월신계통·성신계통·지신계통·산신계통·노신(路神)계통·수신계통·용신계통·화신(火神)계통·풍신(風神)계통·수신(樹神)계통·석신(石神)계통·사귀(邪鬼)계통·명부신(冥府神)계통·역신(疫神)계통·동물신계통·농신(農神)계통·산신(産神)계통 등이며, 인신계통의 무신으로는 왕신(王神)계통·왕녀(王女)계통·왕비계통·장군신계통·장군부인계통·대감신계통·도교신계통·일반일신(一般一神)계통 등이 있다. 이들 신은 주로 지신계통, 산신계통, 수신계통, 장군신계통 순으로 많다.

무속의 신관형태를 보면 무신은 대체로 인격적으로 현현되지만 자연신의 경우 간혹 자연 그대로의 정령(精靈)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들 무신에게 분담된 직능에 있어서는 무한한 능력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무신은 인간에게 어떠한 이성적인 계시를 통하여 그 능력을 행사하기보다는 무서운 고통을 주는 벌로써 신의 의사를 전달시키기 때문에, 비록 인간을 수호해 주는 선신(善神)일지라도 늘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때의 공포는 신성(神聖)의 극치이기도 하다.

무신과 인간의 관계를 보면, 무속에서는 인간의 생사·흥망·화복·질병 등의 운명 일체가 신의 의사에 달려 있는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무신 상호간의 관계를 보면, 최고신으로 천신이 있고, 그 밑에 상층신으로 일월성신·제석신·칠성신 등이 있으며, 중층신으로 지상의 산신·용신·지신, 하층신으로 걸립신·하졸(下卒)·잡귀들이 있다.

이와 같이, 무신의 서열은 최고신·상층신·중층신·하층신의 네 계층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들 무신에게는 각기 인간을 위한 분담된 직무가 있는데, 무신들이 서로 합심이 되지 않을 때 인간은 신들의 알력 여파로 인해 화를 입게 된다고 믿는다.

우주관

무속에서 보는 우주는 천상·지상·지하로 삼분된다. 이들 3계의 우주층에는 각기 해와 달과 별이 있으며, 천상이나 지하에도 지상과 똑같은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천상에는 천신을 비롯한 일신·월신·성신과 그 시종들이 살면서 우주의 삼라만상을 지배하며, 지상에는 인간과 새·짐승, 그리고 산신을 비롯한 일반 자연신이 살고, 지하에는 인간의 사령(死靈)과 그 사령을 지배하는 명부신들이 산다고 믿는다.

천상계는 인간이 늘 동경하는 낙원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의 걱정이 없고 병과 죽음이 없으며, 춥지도 덥지도 않은 채 늘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선계(仙界)로 믿고 있다. 지하계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인데, 생전의 선악과 공과(功過)에 따라 지옥과 낙원으로 구분된다.

지옥은 지하에 있는 암흑계로서 춥고 배가 고프며 형벌이 영원히 계속되는 형장이다. 낙원은 살기 좋은 영생의 세계인데, 낙원이 우주 3계 중의 어느 곳이라고 확실하게 지적되지 않은 채 그저 극락이나 저승으로 생각한다.

지옥은 지하계의 형장으로 그 공간위치가 확실하나 저승은 막연하게 지상에서 수평으로 가는 먼 곳이면서 이승과 저승의 구분이 ‘모랭이(모퉁이)를 돌아간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천상계는 지상의 수직상에 있는 세계로 그 공간위치가 확실하면서 천상계는 지상에서 수직으로 왕래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영혼관

혼은 인간의 정령을 의미하는 넋·혼·영·혼백·혼령 등의 용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무속에서는 인간을 육신과 영혼의 이원적 결합체로 보며, 영혼이 육신의 생존적 원력(原力)이라 믿는다.

영혼은 형태가 없는 기운으로서 인간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의 생명 자체를 영혼의 힘으로 믿는다. 영혼은 또 육신이 죽은 뒤에도 새로운 사람으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거나 내세인 저승으로 들어가서 영생한다고 믿는 불멸의 존재이다.

무속에서는 영혼을 사령과 생령 2종으로 분류한다. 사령은 사람이 죽은 뒤에 저승으로 가는 영혼이고, 생령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 속에 깃들여 있는 영혼이다. 사령은 다시 선령인 조령과 악령인 원귀로 구분된다. 영혼은 살아 있는 사람과 동일한 인격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여 무속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한다.

영혼의 형체는 인체와 같은 모양의 영상을 가지는 것이지만 꿈이나 환상 속에서만 볼 수 있고, 평상시는 영상조차 볼 수 없는 무형의 공기나 호흡과 같은 것이라 믿고 있다.

영혼은 또 공중을 자유롭게 떠다니며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불멸의 것으로 전지전능한 존재라 믿는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공포감이 늘 뒤를 따르게 되어 영혼을 경원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내세관

무속의 내세관은 영혼관을 기반으로 하여 사후에 영혼이 가서 영주한다는 곳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다. 무속에서는 내세에 극락과 지옥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믿는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명부로 가서 시왕을 차례로 거치며 생전의 선악을 심판받아 선한 일을 한 영혼은 극락으로 보내어 영생하게 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의 영혼은 지옥으로 보내서 영원히 온갖 형벌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무속의 표면에 나타난 이러한 형태의 내세는 불교의 극락과 지옥의 내세형태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불교가 들어온 뒤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변질된 후래적 형태의 것으로 보인다.

불교 영향 이전 무속의 내세는 현세를 이승, 내세를 저승으로 하여 내세인 저승은 현세와의 관계를 일체 끊고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믿는 이상향(理想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속의 내세관 속에는 미래에 대한 종교적 구원관념이 없다. 기독교나 불교 등의 종교가 신앙과 종교적 구원에 의하여 내세를 가지게 되는 데 반하여, 무속에서는 현세에서의 일정한 신앙이나 종교적 구원과는 무관한 자연적 순환의 의미로 나타난다.

즉, 사람이 죽으면 영혼으로부터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게 한 근원지인 저승으로 돌아간다는 순환의 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무속의 내세관은 고등종교와 같은 인위적 순환이 가해지기 전의 내세관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유동식,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5)
『한국무속의 연구』(최길성, 아세아문화사, 1978)
「한국의 무교」(김태곤, 『한국종교대계』 Ⅰ, 원광대학교 종교연구소, 1979)
『한국무가의 원형』(김태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한국무속연구』(김태곤, 집문당, 1981)
『한국민속연구』(박계홍, 형설출판사, 1982)
집필자
김태곤·유동식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