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는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왕비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396년(태조 5)에 사망했다. 신덕왕후의 친정 강씨 가문은 고려말의 권문세족으로 이성계의 권력 집중과 조선 개국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방석의 친모로 세자책봉을 둘러싸고 방원(태종)과 갈등하다가 화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존호와 능호를 신덕과 정릉으로 정하고 원찰 흥천사를 세워 태상왕이 직접 원당 제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태상왕 사후 태종이 능을 옮기고 왕비의 제례를 폐했다. 1669년(현종 10)에야 신주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능호는 정릉으로 서울 성북구에 있다.
본관은 곡산(谷山) 또는 신천(信川).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신덕왕후가 집권 거사에 참여하여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뒤 계비가 된 배경에는 신천강씨의 권문세족으로서의 위치가 컸다. 아버지 강윤성과 작은아버지 강윤충(康允忠) · 강윤휘(康允暉) 형제들은 충혜왕 · 공민왕 때 재상권문가로서 세도를 떨쳤다. 강윤휘의 아들인 상장군(上將軍) 강우(康祐)는 이성계(李成桂)의 큰아버지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쌍성만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서 두 집안은 겹사돈 관계에 있었다. 강윤충은 충숙왕의 폐행(嬖幸)이 되어 세를 떨쳤고, 충혜왕 때에는 조적(曺頔)의 난(亂)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아버지 강윤성도 충혜왕과 충목왕 때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또한 강윤휘는 충정왕 때 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356년(공민왕 5)에 원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장사성군(張士城軍)의 토벌군이 동원된 적이 있는데, 이 때 원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이 바로 원나라의 이부낭중(吏部郎中)의 직위를 가진 이성계의 재종숙 이나해(李那海)와 숭문소감(崇文少監)의 직위를 가진 강씨의 오빠 강순룡(康舜龍)이었다. 또한, 부원기(附元期) 때 폐행 권신의 일족으로 발호한 영산신씨(靈山辛氏) 신귀(辛貴)의 처도 강씨의 아우가 된다.
이와 같이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배경을 가진 강씨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위화도회군을 할 당시에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田莊)을 맡아 살림을 따로하고 있었다. 이 때 변고에 대비, 일가족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하여 이천에 있는 한충(韓忠)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현비(顯妃)로 책봉되었다. 신덕왕후의 친가는 이성계의 권력 집중과 조선개국 과정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는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사후 존호와 능호를 각각 신덕(神德)과 정릉(貞陵)으로 정하였다. 개국공신들의 헌의로 국모를 높이는 뜻의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하여 조선의 항식(恒式)으로 삼았고,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수릉직을 맡게 하였다. 그런 뒤 기제(忌祭)를 맞아 경복궁 내 강씨의 처소를 인안전(仁安殿)으로 정하고 영정을 봉안했다가 이듬해 9월 정릉에 영각(影閣)을 지어 옮겼다. 1399년(정종 1) 기일에 흥천사(興天寺)를 원당으로 삼아 제사할 때 태상왕(太上王: 태조)도 참례하였다. 태상왕이 사망한 뒤 1409년(태종 9) 2월에 묘를 사을한(沙乙閑)곡에 이장했다가 다시 한강 남쪽 공현(鞏縣)의 뒤에 이장하여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봄 · 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다.
그 뒤 1412년 기제는 서모나 형수의 기신제(忌辰祭)의 예에 따라 3품관(三品官)으로 제사를 대행하게 하였다. 200여 년 뒤인 1581년(선조 14) 11월 먼저 3사(三司)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6개월 여만에 정파된 바가 있다. 이 때 중신들의 주장은 건원릉비(健元陵碑)에 신의(神懿) · 신덕이 열거되어 있고, 강씨가 차비(次妃)로 서술된 점, 태조가 정한 강비의 시책(諡冊)에 칭송이 엄연한데 그 뜻과 달리 후대인들이 부묘(祔廟: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일)를 폐하고 능을 옮겨 중대한 원(寃)을 남게 한 것 등이 모두 천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 뒤 현종 대에 이르러 정통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이념이 강조되고 예론이 크게 일어나자 강씨의 부묘 문제는 다시 대두하였다. 즉, 1669년(현종 10) 2월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 등은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갖추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이로써 이 해 9월 강씨의 기신제가 8월 11일로 고정되어 200여 년만에 복구되었다. 그리고 추진 기구인 부묘도감(祔廟都監)에서 예조와 함께 시호 제정을 발의하여 순원현경(順元顯敬)으로 정하였다.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고, 능호는 정릉(貞陵)으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소생으로 왕자 이방번(李芳蕃) · 이방석(李芳碩)과 경순공주(敬順公主)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