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취(初娶)는 현빈 유씨(賢嬪柳氏)로 1393년(태조 2) 6월에 폐출되었다. 재취(再娶)는 부유 심씨(富有沈氏) 예문춘추관대제학 심효생(沈孝生)의 딸로 1394년 10월에 세자빈으로 삼았다가 1397년 9월에 현빈으로 봉해졌으며, 1398년 8월에 길례를 올렸다.
아버지 이성계(李成桂)의 공훈으로 유년에 고려로부터 군기 녹사(軍器錄事)에 제수되었다. 1392년(태조 1) 8월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비 한씨(韓氏) 소생의 정안군 이방원(靜安君 李芳遠)의 책립을 주장하였다.
이 때 왕비 한씨는 이미 죽었으므로 태조는 계비 강씨의 의향을 중히 여겨, 제7왕자인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君 李芳蕃)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극렴 · 조준(趙浚) · 정도전(鄭道傳) 등이 굳이 강씨의 소생으로 세자를 삼으려면 성격이 광망(狂妄)하고 경솔한 이방번보다는 이방석으로 삼자고 청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뒤 모후의 보살핌과 정도전 · 남은(南誾) 등의 보도로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혔으나, 1396년 8월에 강비가 죽으면서 세자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1398년 8월 세자 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병권 집중에 반대한 이방원이 주동이 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 남은 · 심효생 및 이방번과 함께 피살되었다.
1406년(태종 6) 8월 소도(昭悼)의 시호를 받았다. 1437년(세종 19) 6월 세종의 배려로 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를 후사로 정하면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오원(五原)을 증읍(贈邑)받고 사우(祠宇)가 건립되었다. 1680년(숙종 6) 7월 영춘추관사 김수항(金壽恒) 등의 상언에 따라 의안대군으로 추봉되었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