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대군은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왕자이다. 1381년(우왕 7)에 태어나 1398년(태조 7)에 사망했다. 이름은 이방번이며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태조와 강비의 사랑을 받아 세자로 내정되었으나, 배극렴·조준·정도전 등이 반대하여 세자 자리를 이방석에게 빼앗겼다. 1398년 8월 이방석의 세자 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병권 장악에 반대하여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다. 1406년(태종 6) 공순군의 시호를 받았고, 1680년(숙종 6) 김수환 등의 진언으로 무안대군으로 추증되었다.
이름은 이방번(李芳蕃). 아버지는 태조이며,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부인은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정양대군(定陽大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이성계(李成桂)의 공로로 어려서 고려로부터 고공좌랑(考功佐郎)에 제수되었다. 조선이 개창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8월 무안군에 책봉되면서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고, 1393년 10월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로 개수되었다. 태조와 강비의 사랑을 받아 세자로 내정되었으나, 배극렴(裵克廉) · 조준(趙浚) · 정도전(鄭道傳) 등이 “성격이 광망(狂妄)하고 경솔하다.”고 반대하여 세자 자리를 동모제(同母第) 이방석(李芳碩)에게 빼앗겼다.
1398년 8월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이 이방석의 세자 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병권 장악에 반대하여 주동한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 때 세자 이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다. 1406년(태종 6) 8월 공순군(恭順君)의 시호를 받았다.
1437년(세종 19) 6월 세종의 배려로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를 후사(後嗣)로 정하면서 입묘봉사(立廟奉祀)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추성(楸城)을 증읍(贈邑)받고 사우(祀宇)가 건립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10월 문종의 시호를 피하여 장혜(章惠)로 개시(改諡)되었다.
1680년(숙종 6) 7월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김수환(金壽桓) 등이 “이방번 · 이방석은 신덕왕후의 부묘(祔廟) 후 법으로써 마땅히 대군으로 증작(贈爵)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빠뜨렸으니 진실로 법에 어그러진다.”라고 상언하여 무안대군으로 추증되었다.
묘는 처음에 도진릉동(道津陵洞)에 소재했으나, 그 뒤 광주(廣州) 학당리산(學堂里山)으로 이장되었다. 1474년(성종 5)에 그 지역이 성종의 능침(陵寢)으로 결정되자 다시 광주(廣州) 광수산(光秀山)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