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6년 태조(太祖, 13351408, 재위 13921398)는 자신의 수릉(壽陵)으로 신덕왕후(神德王后, 1356~1396)의 정릉(貞陵)을 도성 안 취현방(聚賢坊)에 조성하였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해 건원릉(健元陵)에 안장되었고, 이듬해인 1409년 정릉은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옮겨졌다.
현재의 돌거리들을 통해 보면 이때 옮겨진 것은 장명등과 고석(鼓石)뿐이었다. 나머지 정릉 돌거리들은 원래 자리에 매립해 놓았다가, 1410년 광통교(廣通橋)를 흙다리에서 돌다리로 건립할 때 사용하였다. 그래서 현재 청계천 광통교에는 정릉의 병풍석(屛風石) 등 다양한 부재(部材)가 남아 있다.
한편 신덕왕후는 종묘(宗廟)에 부묘(祔廟)가 되지 못하고, 점차 정릉에서 지내는 제향(祭享)이 소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 대인 1581~1583년에 신덕왕후의 부묘가 논의되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1669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건의로 신덕왕후의 부묘가 이루어졌으며, 정릉을 왕릉의 규모에 맞게 보수하여 정자각(丁字閣), 재실(齋室) 등을 지었다. 다만, 돌거리는 1669년에 새로 만들지 않고 이전에 제작된 것이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정릉 봉심(奉審) 기록을 보면, 다른 왕릉에 비해 난간석(欄干石)과 무석인(武石人)만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정릉의 돌거리 중 1396년의 작품은 장명등과 고석뿐이며, 망주석(望柱石), 양석(羊石), 호석(虎石), 문석인(文石人), 석마(石馬)는 16세기 후반의 양식을 보인다. 아마도 신덕왕후 부묘가 논의되었던 1581~1583년 사이에 돌거리들을 추가로 세우고 부묘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정릉은 곡담 안에 봉분이 있고 그 주변에 양석과 호석이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봉분 정면에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로 망주석과 문석인, 석마가 있다. 능강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碑刻), 홍살문이 있으며, 수복방(守僕房)은 1998년, 재실은 2002년에 복원된 것이다. 『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연못도 있었다고 한다.
정릉은 사실상 조선에서 가장 처음 조성된 왕릉이지만, 현재는 초기의 모습이 장명등 등 일부만 남아 있으며 병풍석 등은 광통교에 있다. 현재 정릉의 돌거리는 신덕왕후가 부묘된 1669년경 제작한 것이 아니며 양식상 16세기 후반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