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릉 ()

조선시대사
유적
조선 태조의 4대조인 추존왕 목조의 능.
이칭
이칭
덕안릉(德安陵)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목조|효공왕후
소재지
함경남도 신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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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덕릉(德陵)은 조선 태조의 4대조인 추존왕 목조의 능이다. 목조 덕릉과 효공왕후 안릉이 쌍릉으로 조영되어 있어서, 덕안릉(德安陵)이라고도 한다. 덕릉은 경흥부성 남쪽 안릉과 4리쯤 떨어져 있었으나 1410년 현재의 자리로 천릉하면서 쌍릉으로 조성하고 왕릉에 준해 석물을 갖추었다. 덕릉은 현재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에 있다.

정의
조선 태조의 4대조인 추존왕 목조의 능.
건립경위

목조(穆祖)는 조선 태조의 4대조이며, 이름은 이안사(李安社, ?~1274)이고, 오동(斡東) 천호(千戶)를 지냈다. 1392년 태조가 즉위하자 목왕(穆王)으로 추존하고, 덕릉(德陵)으로 추봉하였다. 목조의 비는 효공왕후이고,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가 아들이다.

덕릉은 처음에는 경흥부성(慶興府城) 남쪽에 있었으나 야인(野人)들의 침입을 걱정하여 1410년 현재 자리로 천릉하였다. 덕릉과 안릉을 천릉하면서 쌍릉과 합장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주자(朱子)의 ‘혈(穴)은 같이 하고 곽은 각각 쓴다는 설(設)’을 모방해 동원이영(同原異塋)으로 조영하였다. 그래서 덕릉은 서편, 안릉은 동편에 있다.

변천

1411년에는 덕릉과 안릉에 표석과 재실을 지었으며, 조선시대 내내 지속적인 관리를 하였다. 1901년에는 고종(高宗)이 어필(御筆) 표석을 세웠으며, 덕릉과 안릉뿐만 아니라 지릉(智陵), 숙릉(淑陵), 순릉(純陵), 정릉(定陵), 화릉(和陵)에도 표석을 건립하고, 1906년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형태와 특징

덕릉과 안릉은 상중하계(上中下階)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계에는 한 곡장 안에 덕릉과 안릉의 봉분이 각각 병풍석을 두르고 있고, 각 봉분 앞에 혼유석이 있다. 각 봉분 주변에는 양석, 호석이 각기 2쌍씩 배치되어 있다.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2쌍, 하계에는 무석인 2쌍과 마석 4쌍이 배치되어 있다.

덕릉과 안릉의 정자각은 능 아래 70보 거리에 있으며, 정자각 주변에 수라청(水刺廳)과 망예위(望瘞位)가 있다. 홍살문은 정자각 동쪽 170보, 비석은 정자각 동쪽 160보, 재실은 홍살문 동쪽 210보에 있다.

금석문

1906년 건립된 비각 안에는 덕릉과 안릉 표석 총 4기가 있다. 1410년에 건립된 덕릉 표석은 앞면에 ‘목왕덕릉(穆王德陵)’, 뒷면에 ‘영락팔년시월일립(永樂八年十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1901년에 건립된 고종 어필 표석에는 앞면에 ‘대한목조대왕덕릉(大韓穆祖大王德陵)’이라는 전서(篆書)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 음기(陰記)가 있다.

의의 및 평가

덕릉은 조선 전기 추존왕릉의 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병풍석에 인석(引石)과 난간석이 없는 것이나, 망주석이 설치되지 않은 점, 마석이 하계에 모여 있는 점 등 15세기 왕릉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원전

『북로능전지(北路陵殿誌)』
『춘관통고(春官通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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