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는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영향을 받아 설치된 군직으로 1,0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의 명칭이다. 1281년(충렬왕 7)에 남해안 요충지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둔 이래 각지에 설치된 만호부 내에서 만호의 휘하에서 1,0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으로 배치되었다. 천호는 일반적으로 고려 국왕의 천거에 따라 원나라 황제가 임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대 이후로는 원나라의 영향력과 상관없이 국내의 무장들에게 천호직을 수여하였으며, 우왕 대 이후에는 각 익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전국에 배치되었다.
원나라에서 고려인에게 천호직을 수여한 것은 1258년(고종 45)에 조휘(趙暉)와 함께 화주(和州) 이북 땅을 들어 몽골 제국에 투항한 탁청(卓靑)의 사례가 최초이다. 그 뒤 1280년(충렬왕 6) 원나라가 제2차 일본 정벌을 앞두고 이에 동원된 고려의 무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상장군 박지량(朴之亮), 대장군 나유(羅裕) 등 10명에게 무덕장군(武德將軍, 정5품) · 관군천호(管軍千戶)를 제수하였다. 당시 고려 정부는 이들에게는 총관(摠管)을, 대장군 조변(趙抃) 등 10명에게는 천호를 제수할 것을 요청했으나 원나라에서는 한 등급씩 낮추어 제수했던 것이다.
일본 정벌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인 1281년(충렬왕 7) 고려에는 만호부(萬戶府)가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만호와 함께 임명 사례도 빈번해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실제로 천호를 임명한 사례는 확인되지는 않는다. 다만, 1300년(충렬왕 26)에서 1307년(충렬왕 33) 사이에 설치된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의 직제에서 정원 1인의 천호를 두었다는 것과, 충숙왕 때 강융(姜融)이 천호를 역임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천호의 임명은 원나라 황제가 직접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만호와 마찬가지로 고려 국왕이 천거하면 원나라에서 형식적으로 임명하는 절차를 밟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356년(공민왕 5)의 개혁 조치 이후로는 천호의 성격이 크게 변하여 원나라와 전혀 관계없는 고려의 독자적인 무관직으로 정착되었다.
공민왕(恭愍王) 말엽에 수군이 재건되면서, 천호는 만호와 영선두목인(領船頭目人) 사이에 위치하여 각 도에 배치된 수군의 지휘 체계를 구성했다. 1378년(우왕 4)에 서북면(西北面)의 예에 따라 전국에 익군(翼軍)이 조직될 때에는 각 익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전국에 배치되었다. 이때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부터 4품 이상이었으며, 1,000명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익군의 확대 조치가 곧 철회됨으로써 서북면에서만 익군의 지휘관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제도적으로 정비되어 1398년(태조 7)에 4품 이상의 서반직(西班職)으로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5품직으로 낮추어지면서 6품의 부천호(副千戶)가 신설되었고, 1443년(세종 25)에는 부천호를 합하여 5·6품직으로 고정되었다. 수군에서 맡은 임무는 조운선(漕運船)을 호송하는 것이었다. 조운선 30척을 하나의 선단(船團)으로 하여 선단마다 1인씩 두었는데, 해운판관(海運判官)이 임명하고 호조에 보고하였다.
1457년(세조 3)에 영진 체제(營鎭體制)가 진관 체제(鎭管體制)로 바뀌었다. 천호는 수군에서는 각 도의 요충지에 배치되어 주로 조운선을 담당하였고, 육군에서는 북방 내륙의 제진에 배치되어 지방 수령이나 만호 밑에서 그 진을 다스렸다. 그 뒤 천호는 1459년(세조 5) 평안도 · 함경도의 정군(正軍)과 남도 해안 지역의 시위패(侍衛牌)가 정병으로 일원화됨에 따라 점차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