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유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진도에서 원수 김방경을 따라 삼별초를 토벌하는 공을 세운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292년(충렬왕 18)
본관
나주(羅州)
정의
고려후기 진도에서 원수 김방경을 따라 삼별초를 토벌하는 공을 세운 무신.
개설

본관은 금성(錦城). 삼한공신대광(三韓功臣大匡) 나총례(羅聰禮)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형부상서(刑部尙書) 나득황(羅得璜)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음보(蔭補)로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가 되었고, 1269년(원종 10) 4월에 세자 심(諶: 훗날의 충렬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입조하였다. 그해 7월 세자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와 파사부(波娑府: 현재 중국의 단둥)에 이르렀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세자의 입국을 기다리자 세자가 국경에 들어가는 것을 만류하였다. 이러한 개인적인 감정으로 임연이 나유(羅裕)의 장인인 조문주(趙文柱)를 죽이고 나유를 협박해 이혼을 강요했으나 의리를 들어 거절하였다.

1271년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진도(珍島)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1272년에도 전라도의 삼별초를 치는데 군사 1,550명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1273년 김방경을 따라 탐라(耽羅: 현재 제주도)의 삼별초 토벌에 선봉장으로 참전해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이때의 공로로 남녀 노비 2명이 하사되고 원나라로부터 중통보초(中統寶鈔)를 받았다.

1274년 정월 일본정벌에 필요한 300척의 전함을 건조할 때, 담당 부부사(部夫使)가 되어 공장(工匠)과 인부 3,500여 명을 징집하는데 힘썼으며 그 경과를 보고하는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10월 제1차 일본정벌 때 도독사(都督使) 김방경과 함께 원나라의 도원수 홀돈(忽敦)의 휘하에서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종군하였다.

돌아와서는 응양군대호군(鷹揚軍大護軍)이 되었으며, 그 군공(軍功)으로 원나라로부터 금패(金牌)와 무덕장군관고려군천호(武德將軍管高麗軍千戶)를 받았다. 그 뒤 제2차 일본정벌을 위해 합포(合浦: 현재 경상남도 마산시)에 3번이나 출진하였다. 이때 예법에 밝다 하여 개경으로 소환되어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을 맡기도 하였다.

1282년(충렬왕 8) 5월에 2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286년 8월에 지신사(知申事), 이듬해 6월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12월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87년 6월 왕에게 내안(乃顔: 원나라의 반란세력)을 직접 정벌하도록 청해 호두패(虎頭牌)를 받고 중익부만호(中翼副萬戶)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5월 만호동지밀직사사(萬戶同知密直司事)로 왕의 선두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에 참여하였다. 일이 끝난 후 1등공신에 책봉되었고 녹권(錄券), 전(田) 100결, 노비 20구(口), 명위장군(明威將軍)의 호를 받았으며 원나라로부터 쌍주금패(雙珠金牌)를 받았다.

1289년 3월 충청도도순문사(忠淸道都巡問使)가 되어 군량을 독려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동계방수군(東界防戍軍)을 징발하였다. 1290년 5월에 합단(哈丹)이 국경을 침입할 때 통천(通川)의 경계에 주둔하여 그를 막았으며, 평양과 연기(燕岐)에서 합단을 크게 무너뜨렸다. 이듬해 6월 교주도(交州道: 현재의 강원도)에 파견되어 합단의 잔병을 토벌하였다.

1291년 11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원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다녀왔다. 이때 원나라로부터 삼주호부(三珠虎符)·옥대(玉帶)·은정(銀錠)·궁시(弓矢)·검(劍)·안마(鞍馬) 등을 받고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의 호를 받아 이듬해 돌아왔다. 예의에 밝고 옥사(獄事)의 판결에도 능하였다. 또한 용맹이 있어 전쟁에 임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아 변방에서 자주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려시대사』(김상기, 동국문화사, 1961)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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