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공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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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개념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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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
개설

제정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936년(태조 19) 고려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 神興寺)를 중수하면서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두고 동쪽과 서쪽 벽에 삼한공신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936년에서 940년 사이에 제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삼한공신과 그 가운데 특히 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사이에는 위계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구별하지 않고 삼한벽상공신도 삼한공신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공신당에 오른 공신이 삼한공신에 한정되었고 공신당 설치 이후 태조의 재위기간이 3년에 불과하므로, 삼한공신은 태조공신이나 개국공신 등 태조대의 공신을 총괄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수효는 명확하게 전하지 않으나, 태조 대의 공신이 3,200명 정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대략 이에 버금갈 만큼 많은 숫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책봉된 사람들은 통일전쟁에 직접 참여한 태조의 막료(幕僚)뿐만 아니라, 태조에게 협력한 각 지방의 대소 호족(豪族) 및 그의 막료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직첩(職牒)이 내려지고 이를 전승하게 함으로써 그 후손들은 문음(門蔭)의 특전을 수시로 받게 되었다. 이와 함께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 또는 역분전(役分田)의 형태로 경제적 기반이 보장되었다. 특히,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역분전의 설치시기는 940년이다. 이는 신흥사의 공신당에 삼한공신이 벽상된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역분전의 설치가 삼한공신에 대한 경제적 우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공신들을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은 데서 보이듯이, 이들은 자기 본거지에서 이전의 지위를 그대로 보장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성이 태조에 대한 신속(臣屬)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삼한공신의 책정은 고려왕실을 구심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지배세력의 재편성이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태조 이후 광종의 왕권강화와 성종 대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따라 이들은 호족으로서의 독립성을 점차 상실하고 중앙정부의 관료로 변신하게 되었다. 한편, 태조 대 이후의 공신은 삼한후공신(三韓後功臣) · 삼한후벽상공신이라 해 삼한공신과 구별하고 있다.

이 경우 흔히 양자를 병렬시켜 삼한전후공신(三韓前後功臣) · 삼한전후벽상공신으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삼한공신이 고려 공신제도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태조(高麗太祖)의 삼한공신(三韓功臣)」(김광수, 『사학지(史學志)』 7, 1973)
「高麗初期の功臣特に三韓功臣の創設 -唐末·五代·宋初の功臣との關連において-」(周藤吉之, 『東洋學報』 66,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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