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읍은 고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시행된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하나이다. 고조선 말기 연맹국가 ‧ 열국기에 제가(諸加)의 읍락(邑落) ‧ 하호(下戶) 지배 현실을 바탕으로 성립한 제도로, 삼국시대~고려 초기까지 관료제와 군현제의 변화에 맞추어 체계적으로 개편 ‧ 운영되었다. 고려 전기에 형식상 봉작제(封爵制)와 결부되어 대부분 왕족이나 관료에게 수여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왕족에 대한 식읍 수여조차 중단되었다. 조선 단종 때 수양대군의 식읍을 마지막으로 역사적 역할을 다하였다.
고대국가가 주변 소국을 정복하거나 자발적으로 신속(臣屬)하도록 회유하는 과정에서 얻은 피정복 지역 · 신속 지역의 민호(民戶)를 헤아려(식읍민) 공로자(식읍주)에게 수여하는 제도이다.
고조선은 견실한 성[실용(實墉)], 튼튼한 해자[실학(實壑)], 충실한 농토 파악[실무(實畝)], 내실 있는 양전과 호구 조사[실적(實籍)]를 바탕으로 1/20세의 조세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지』 권30 위서 30 동이전 30 한(韓)조에 “서기전 195년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準)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조선의)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朝鮮)의 번병(藩屏)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위만을) 믿고 사랑하여, 박사(博士)로 임명하고, 규(圭)를 하사(下賜)하며, 100리의 땅을 봉해 주어[봉백리(封百里)],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역사가가 알려준 기록의 번병, 즉 국가의 울타리는 봉건 · 봉지(封地) 제도의 가장 근본적 요소이고, 규는 왕이 제후를 봉할 때 주는 신표(信標)이며, 보통 공후급(公侯級)에게 100리의 땅을 봉하여 준다. 우리나라에서 신하로 예속한 공로자에게 분급한 식읍의 기원이 되는 기록이다.
이러한 봉국 · 봉지제적 식읍에서 국왕의 귀족신료 대상의 식읍으로 변환한 시기는 고조선 최말기에서 고구려 건국 초기였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 한(漢)나라를 기점으로 이전에는 분토(分土)로 지역 할당하던 것을, 이후 분민(分民)으로 주민 할당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왕토 왕신 사상(王土王臣思想)으로 국가의 공공 관리 체계 아래에 있던 고조선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지역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것에서, 내실 있는 봉호(封戶) 편제 기반의 식읍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서기전 36년(동명성왕 2)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하자, 해당 지역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봉송양위주(封松讓爲主)]는 것이 전자의 마지막 형태이고, 서기전 9년(유리명왕 9)에 선비를 속국으로 만드는 공(功)을 세운 부분노(扶芬奴)에게 분민으로 식읍을 수여하는 것은 후자의 새로운 형태였다.
이 시기 식읍주(食邑主)와 식읍민(食邑民)의 관계는 읍락 호민의 하호 지배와 마찬가지거나 더 가혹하였다. 중국 역사가들은 식읍주를 대가 혹은 조세를 먹고 사는 좌식자(坐食者)와 마찬가지라고 인식하였으며, 식읍민을 하호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 30 동이전 30 고구려조에 보면 "식읍주와 식읍민의 관계는, 식읍민이 국가에 내는 부세를 위임받은 미량어염을 식읍주에게 제공하는 것이 기본인데, 실제는 주노(主奴) 관계에 견줄 만큼 강한 인신적 예속 상태에 있었다[대가부전작(大家不佃作) 좌식자만여구(坐食者萬餘口) 하호(下戶) 원담미량어염(遠擔米糧 · 魚鹽) 공급지(供給之)]"고 서술하였다.
삼국시대 제가(諸加) 아래의 읍락 · 읍락민적 조세제도가 국가 · 국왕 아래의 군현 · 군현민적 조세제도로 변경되면서 식읍제의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608년(신라 진평왕 30)에 신라가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중국 수(隋)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글을 작성하도록 부탁받은 원광(圓光)은, "자신을 구하고 남을 없애는 것은 스님이 행할 바는 아니지만, 대왕의 영토에 살고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재대왕지토지(在大王之土地), 식대왕지수초(食大王之水草)] 거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왕토 왕신 사상이다.
그러면서 삼국은 이전보다 한 뙤기의 논밭과 한 사람의 민인(民人)이라도 더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토질이 기름진지 척박한지를 고려하면서 한 뙤기의 논밭까지 파악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쓰던 수확량 중심의 결부와 중국에서 사용하던 면적 중심의 경무를 똑같다고 간주하는 한국식 경무(頃畝) 양전법을 사용하였다.
결부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인 곡식 한 웅큼[1악(握)]의 수확량과 함께 예전에는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곡식 한 웅큼 수확량을 담보할 수 있는 한 발[1파(把)]의 농지 면적[파적(把積)]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당시 1결의 면적[결적(結積)]은 1만 8488평이므로, 1/100결적인 1부의 면적[부적(負積)]은 184.88평, 1/1000결적인 1속의 면적[속적(束積)]은 18.488평, 1/10000결적인 1파의 면적[파적]은 1.8388평이 된다. 삼국시대 농촌 현실에서 파적으로 잴 수 없는 논밭은 없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조세를 부담하는 민인 한 사람까지 파악하기 위하여 삼국은 편호소민(編戶小民)제를 운영하였다. 『삼국사기』 권48 도미전에 나오는 백제 사람인 도미는 호적에 편입된 평민, 즉 편호소민이었다.
자연호는 출생과 사망, 도망과 이사 등 자연스런 이유로 형평성과 항상성이 가장 중요한 조세 부과의 기본 단위가 되기 어려우므로, 어느 정도 가족의 차이를 배려하면서 조세 부과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집안사람과 이웃으로 묶은 편호를 조세 부과 단위로 삼았다. 「 신라촌락문서」가 알려주는 바와 같이 기준을 정하여 자연호를 편호로 편성하고, 편호에 등급연을 설정한 이유도 조세 부과의 형평성과 항상성 유지가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전국 모든 마을의 토지와 민인을 일시에 파적 중심의 결부제와 편호소민제로 편성할 수는 없었지만 단계적으로 집행됨에 따라, 제가 아래의 읍락 · 읍락민적 조세제도를 국가 · 국왕 아래의 군현 · 군현민적 조세제도로 변경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시기에 따라 골품관료 · 귀족관료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중앙 관료제 역시 새로운 통치 구조에 맞게 양적 · 질적으로 재편하게 되었다. 새로운 원리와 형식으로 시행된 녹읍제(祿邑制) · 전시과(田柴科) · 과전법(科田法)이라는 수조지 · 수조권 분급제는, 강화된 왕조국가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물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였다.
우리나라 중세 국가와 국왕은 귀족관료들에게 충성을 제공받는 대가로 그들에 대한 물질적 혜택을 부여하여야 했다. 이들은 봉건으로서의 명분을 그대로 구사하고, 이를 실제적 · 체계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는 제도 구축을 원하였다.
녹봉제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토지 자체를 떼어 줄 수는 없었고, 일정 군현을 떼어 줄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국가와 국왕, 귀족관료들이 합의한 제도가 바로 조조(租調) · 조부(租賦) · 부세(賦稅) 등으로 표현되는 조세제도에서 토지에 입각하되 여기서 수취하는 조(租), 곧 전조(田租)를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승인하고, 일정량씩 작정하여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귀족관료의 직무 봉공 및 충성에 대한 대우로 전조의 징수권을 분급하는 제도와 수조지 · 수조권 분급제가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식읍제의 역할은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고대국가에서 큰 역할을 하였던 식읍의 분급은, 모든 왕족이나 귀족관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나 왕실에 매우 특별한 공로가 있을 때에 국가가 취할 수 있었던 특수한 포상이었다. 굳이 전답의 면적을 고려하지 않고 수확량 중심의 결부제를 운영하고, 형평성과 항상성까지 고려할 필요 없이 식읍주가 거느리는 읍락에 살던 읍락민과 자연호에 대한 수취까지 동반하였던 식읍을 지속하기에는 역사적 환경이 너무 바뀌었다.
532년(법흥왕 19)에 신라에 신속한 금관가야 김구해에게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는 기록은, 이전과 같이 금관가야의 모든 민인을 식읍 농민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신라의 군현민으로 개편된 금관가야의 민인 가운데 일부를 봉호로 삼은 것이다. 839년(신무왕 원년)에 신무왕 즉위에 공을 세운 장보고에게 식실봉(食實封) 2,000호를 내렸다.
식읍 수취권은 수봉자(受封者) 당대에만 행사할 수 있었고 세습할 수 없었다. 식읍주의 식읍 농민은 군현민이면서 봉호였기 때문에 봉호가 배정된 군현은, 식읍주가 해당 군현에 배정된 봉호를 판정하거나 식읍 수취권을 행사할 때 협조와 동시에 행정을 감독할 수 있었다. 봉호는 평민 가운데 대체로 넉넉한 집안을 배정하였을 것이므로 식읍으로 설정한 지역은 물산이 풍부하고 사람들이 많은 마을이었을 것이다.
식읍주는 자신의 가신(家臣)과 노비를 동원하여, 국가에서 정한 조(租) · 조(調) · 역(役)을 봉호에게 징수하였다. 그러므로 녹읍 등 수조권자보다는 물량의 차가 엄청났다. 더구나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규정 외로 식읍 농민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제한된 사례지만 식읍주 집안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경제적 성과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결과 자격 요건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웠던 녹읍 등 수조권자와의 갈등도 예상할 수 있었고, 봉호이면서 군현민이었던 식읍 농민들의 반발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통일기에 식읍 수여는 제한된 경우에 한해 매우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시행되었을 것이다.
고려 전기 수조지 · 수조권 분급제가 안정되어 수조권 분급 토지가 귀족관료들의 실질적인 물질적 토대가 되자, 오히려 식읍은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대상에게 주어 수봉자의 명예를 높여 주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문종 때에 공 · 후 · 백 · 자 · 남의 5등봉작제(五等封爵制)에 따라 제도를 정비하였다.
공 · 후 · 국공(國公)은 식읍 3,000호 정2품으로, 군공(郡公)은 식읍 2,000호 종2품으로 정비하였고, 현후(縣侯)는 식읍 1,000호, 현백(縣伯)은 식읍 700호, 개국자(開國子)는 식읍 500호로서 모두 정5품으로, 현남(縣男)은 300호 종5품으로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작위와 식읍 수가 실봉(實封)과 허봉(虛封) 등으로 일치하지 않은 것도, 같은 배경과 취지에 따른 것이었다.
식읍의 수여 대상은 주로 왕자 · 왕손 등 왕족이었고, 왕실의 척신이나 공로가 큰 고위 관료였다. 그다지 많은 사례는 아니지만 명목 · 명의에 그치지 않은 경우, 식읍의 구성 단위는 식읍 몇 호, 혹은 식읍 몇 호와 식실봉 몇 호 등의 형식으로 수여되었다. 비교적 부유하고 안정된 집안을 운영하던 평민 가운데 선정된 식읍민인 봉호는 자연호가 아니라 과호(課戶)였고, 식읍민은 자신이 부담해야 할 조 · 포 · 역을 식읍주에게 직접 납입하였다.
고려 후기로 오면 안동 · 경산부에 제국대장공주와 이를 다시 자신의 것으로 한 충선왕의 식읍 사례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왕족에 대한 식읍 수여조차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개국 1등 공신 가운데 일부 특정 왕족에게 상징적으로 지급한 사례만 보이고, 그나마 수양대군의 식읍이 마지막 사례인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부터는 실질적인 토지제도로서의 역할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고대 국가와 국왕이 귀족관료들에게 충성을 제공받는 대가로 그들에게 부여한 물질적 혜택이었다. 중세국가 성립 이후 수조지 · 수조권 분급제에 그 자리를 내어 주면서 점차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