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古朝鮮) 때에는 중국과 경계를 이루던 강을 지칭했다.『사기(史記)』조선전(朝鮮傳)의 기록에 따르면, 한(漢)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뒤 요동(遼東) 지방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요동과 고조선과의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패수가 줄곧 중국 세력과의 경계선이었다는 것은 위씨정권(衛氏政權: 衛滿朝鮮) 말기에 한나라의 사신 섭하(涉河)가 우거왕(右渠王)을 만난 뒤 귀국 길에 자신을 호송하던 고조선 관리를 살해하고 달아난 장소가 다름 아닌 패수였다는 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 초에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패수를 오늘날의 청천강(淸川江)에 비정(比定)했으며, 그 뒤 이병도(李丙燾)가 이 설을 상세하게 고증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패수를 압록강(鴨綠江)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요서(遼西) 지방의 대릉하(大凌河)나 난하(灤河)로 보는 설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연·진(燕·秦) 시기 장성(長城) 유적은 요령성 북부 일대에 뚜렷이 남아 있으며, 장성의 끝으로 보이는 양평은 현재 요하(遼河) 동쪽 요양(遼陽)으로 비정하고 있어 패수는 요하 유역으로 볼 수 없다. 때문에 패수는 대릉하나 난하로 보기는 어렵고 청천강이나 압록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고학적 측면에서 볼 때는 명도전(明刀錢)이나 철기 등 중국 계통 유물과 세형동검(細形銅劍) 등 조선 계통 유물의 출토지가 청천강을 경계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패수라는 명칭은 계속 쓰였으나, 청천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삼국시대의 패수는 대동강(大同江) 혹은 예성강(禮成江)인데,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百濟本紀)에 서기전 6년(온조왕 13)경 백제의 북쪽 경계선으로 기술되어 있는 패하(浿河)는 예성강을 가리킨다. 하지만 735년(성덕왕 34)에 당나라가 정식으로 신라의 영유권을 공인한 이른바 ‘패강 이남의 땅’의 패강은 지금의 대동강을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