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국을 다물국(多勿國) 또는 다물도(多勿都)라 표기함에 따라 송양은 다물후(多勿侯)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그는 주몽(朱蒙)이 찾아오자, 그가 여러 해 동안 그곳에서 왕노릇을 해온 점과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주몽더러 부용(附庸)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주몽은 이에 불응하고 활쏘기로 겨루어 승리함으로써 송양은 이듬해에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한다. 이 사실은 송양이 고구려에 앞서 동가강 유역의 지배자로 군림하였으나, 고구려 주몽에게 그 지배권을 상실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 ‘양’의 음이 고구려 5부의 하나인 소노(消奴)와 유사함을 근거로 하여 고구려의 왕실 교체가 소노부에서 계루부(桂婁部)로 전이(轉移)됨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의 딸은 유리왕의 비가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