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인 수로왕의 9세손으로 성은 김씨이다. 겸지왕(鉗知王)의 아들로 521년에 즉위하여 532년 신라 법흥왕에 항복했다.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조에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라고 하였다.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 · 무도(茂刀) · 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를 뿐이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562년(진흥왕 23)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또한 「개황력( 開皇曆)」을 인용하며 532년에 망한 사실을 아울러 제시하고 있다. 562년에 멸망했다는 것은 가야국 가운데 마지막으로 신라에 병합된 대가야의 멸망 연대가 562년임으로 해서 생긴 착오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 대접하고, 왕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였다. 구형왕 때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신라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특히 정치적으로는 신라 무열왕계와 결합하면서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 김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무력은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 고위 신료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당시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할 때 지휘관으로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553년에 아찬(阿湌)의 벼슬로서 신주(新州)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다음해에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군과 싸워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다.
한편,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구형왕릉(仇衡王陵)의 능으로 전해지는 방형의 석축이 있으나 그 사실성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