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가야의 한 나라.
내용
『일본서기』 흠명(欽明) 2년(541) 4월조에 ‘다라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라는 기록이 있다. 하한기는 다라국의 관직이며 이타는 인명으로 보인다. 이는 이미 신라에 병합된 금관가야(金官伽耶) 등을 재건하기 위하여 백제 성왕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하는 인물이다. 임나부흥회의 또는 임나복건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는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544년에 한번 더 개최되었다. 이때도 다라는 회의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이수위(二首位)의 직위에 있는 흘건지(訖乾智)라는 인물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보면 다라는 관직제도를 갖춘 나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라는 가야 멸망 기사인 562년(흠명 23) 춘정월조에도 보인다. ‘신라가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 … …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加羅國)‧안라국(安羅國)·사이기국(斯二岐國)·다라국·졸마국(卒麻國)·고차국(古嗟國)·자타국(子他國)·산반하국(散半下國)·걸찬국(乞飡國)·임례국(稔禮國)이라고 하여 합해서 10국(國)이다’라고 한 기사에서 보이고 있다. 이로 보면 다라는 신라의 침략에 끝까지 맞서다 멸망한 대가야와 최후를 같이한 가야국으로 보인다. 그 멸망의 시기는 562년으로 추정된다.
다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 소재하였을 것으로 비정해왔다. 이는 합천의 옛 이름이 대량(大良), 또는 대야(大耶)로, 다라와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에 소재한 옥전고분군에 대한 조사가 국립경상대학교에 의해1985년 이래 다섯 차례 행해졌다. 3,000여 점의 유물과 함께 독특한 구조의 유구 및 갑주, 마구, 보관을 비롯한 호화로운 귀금속제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유구와 유물의 양과 질은 어떤 타 가야 고분 출토품에 비해 보더라도 손색이 없는 우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이 옥전고분군은 곧 다라국 지배집단의 묘역으로 보고 있다. 더구나 고분군과 1㎞ 정도 떨어진 곳에 다라리(多羅里)가 존재한다는 점은 이곳에 다라국이 존재했었다는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일본서기(日本書紀)』
- 『옥전고분군과 다라국』(조영제, 혜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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