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군주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구절이 두 차례 나온다. 첫째는 185년( 벌휴이사금 2)에 좌우 군주를 임명한 기사이며, 둘째는 505년(지증마립간 6)에 실직주(悉直州, 현 삼척)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는 기사이다. 전자에서처럼 신라 초기의 군주는 육부병(六部兵)을 지휘하는 관직으로 보이며, 다만 그것이 임시직이었는지, 상임직이었는지는 해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신라 중고기(中古期)에는 지방 및 왕경 주둔 군단의 지휘관을 군주라고 하였다. 후자는 바로 그것의 시작을 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직주는 원래 실직정(悉直停)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停)은 군영(軍營)을 의미한다. 즉 중앙군의 한 군단을 실직에 주둔시키면서 그 지휘관을 군주라고 한 것으로 이해된다.
525년(법흥왕 12)에는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의 군주를 임명하였는데, 이것 역시 사벌정의 설치와 그 군단장의 임명을 의미한다. 544년(진흥왕 5)에는 대당(大幢)을 설립하였는데, 왕경 주둔 군단을 대당으로 편성한 것이며 그 지휘관 역시 군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6세기 중엽 상주(上州), 하주(下州)와 같은 광역 행정구역 혹은 군 관구로서의 주(州)가 성립하면서 군영은 점차 그 중심지, 즉 주치(州治)로서 기능을 하게 되고, 군주는 그 장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561, 이하 창녕비)에서는 사방군주(四方軍主)의 주둔지, 즉 4개의 군영과 각 군단의 관구라고 할 수 있는 4개의 주, 즉 상주, 하주, 신주, 동해안 방면을 확인할 수 있다.
군영은 전략적인 필요에 따라서 종종 이동하였지만, 광역 구역의 범위는 대체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군영이 늘려서 설치되고 신주(新州)나 하주가 각각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면서, 군영의 소재 지명이 곧 주명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군주가 군영의 지휘관이면서 주의 장관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직관지는 주의 장관이 군주에서 661년(문무왕 원년)에 총관(摠管)으로, 785년(원성왕 원년)에 다시 도독(都督)으로 개칭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본기에는 주의 장관인 군주는 대체로 656년(태종무열왕 3)까지 나타나며, 총관이라는 명칭은 문무왕 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통일 전쟁기에는 중앙의 대당과 상주정, (북)한산정, 우수정, 하서정, 하주정 등 육정(六停) 군단이 행군(行軍) 조직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이때 복수의 총관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신문왕 대부터 주의 장관으로 단수의 총관이 임명되었으며, 주의 장관을 총관이라고 한 사례는 혜공왕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천선진리비’에서도 확인된다.
신라본기에서 도독 칭호는 642년(선덕여왕 11)부터 나타나 경향성을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원성왕 대 이후에는 도독에 대한 기록만 나타난다. 대체로 문무왕 대부터 주의 장관을 도독이라고 불렀고, 685년(신문왕 5)부터 총관이라고도 하다가 785년(원성왕 원년)부터는 도독으로만 불렀을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편 신라본기에는 783년(선덕왕 4)에 체신(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직관지에서는 782년(선덕왕 3)에 처음으로 대곡성 두상(頭上)을 두었다고 하였다. 대곡진은 패강진(浿江鎭)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의 군진 역시 중고기의 군영과 유사한 성격이 있고 주를 관할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장관을 군주라고 불렀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직관지와 같이 두상 혹은 두상대감(頭上大監)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신라 중고기의 군주는 군단의 지휘관이자 광역 주의 장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체로 군관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중고기 주의 행정관으로는 창녕비에 보이는 행사대등(行使大等) 정도가 알려져 있다. 주마다 2인이 있었는데 대체로 군주보다 하위 관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창녕비에는 비자벌군주(比子伐軍主)와 더불어 비자벌정조인(比子伐停助人)이 보이는데, 이 시기 군주의 부속관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통일기 주 장관의 보좌관으로는 주조(州助)와 장사(長史)가 있었는데, 그것의 성립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로 도독 칭호가 도입된 문무왕 대로 추정된다. 이처럼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직제가 개정되고 또 신문왕 대에 구주의 치소, 즉 주치가 고정되면서 주 장관인 도독은 군주에 비해 행정관적인 성격이 강화된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