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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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전경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전경
고대사
유적
문화재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진흥왕이 건립한 기적비. 국보.
이칭
이칭
창녕순수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보(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
정의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진흥왕이 건립한 기적비. 국보.
개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에 있다. 원래는 창녕읍 목마산성(牧馬山城) 서쪽 기슭에 있었다.

이 비 옆에는 성황당이 있었고, 목마산성 줄기에 잇대어 고분군이 산재해 있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창녕의 고적을 조사하러 왔던 도리이(鳥居龍藏)가 신라 비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보고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는 창녕읍 교상리로 옮겨 비각 안에 보존하고 있다.

내용

비석의 높이는 162㎝, 너비는 174㎝, 두께는 30∼51㎝이다. 화강암의 자연석 앞면을 편평하게 다듬어 글자를 새기고, 비면의 둘레에는 윤곽을 선으로 새겼다.

비문은 육조풍(六朝風)의 해서(楷書)로 씌어졌는데, 각 행 18∼27자씩 모두 27행 643자이다. 비문의 전반부는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렵기는 하지만, 맨 처음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있어 561년(진흥왕 22)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와는 달리 비문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명(題名)이 보이지는 않으나, 어가(御駕)를 수행한 신료(臣僚)들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판독이 어려운 비문의 전반부는, 다른 확인되는 글자와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의 비문을 통해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대략 신라 진흥왕이 창녕의 비사벌(比斯伐) 가야를 점령해 영역을 확대하고 강토를 개척한 사실, 그리고 진흥왕이 창녕에 순수(巡狩: 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해 내외 고관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왕으로서의 통치 이상과 포부를 밝히는 한편,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이 일치 협력해 백성을 잘 이끌라고 한 유시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진흥왕이 창녕에 순수한 해가 대가야가 멸망한 때로부터 불과 1년 전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는 가야 지역에 대한 정치적 선무(宣撫)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55년 진흥왕은 창녕에 하주(下州)를 설치할 정도로 이 지역을 중요시하였다. 이는 창녕을 가야 지역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다. 따라서 진흥왕의 창녕 순수 역시 기존의 토착 세력을 선무함과 동시에 새로운 지배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비문의 후반부는 글자가 비교적 명료해 판독하기 쉬운데, 왕을 수행한 신료들을 중앙 행정관, 지방 군정관, 지방 행정관, 시종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각 신료들에 대해서는 관직명, 출신 지역명, 인명, 관등명의 순서로 기록하였는데, 관직명과 출신 지역명이 앞 사람과 똑같은 경우에는 생략하였다.

이 비문의 후반부를 통해 지방 행정 조직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즉, 정복한 지역을 네 구역으로 분할해 통치하고, 각기 최고 군정관인 군주(軍主)를 두는 사방군주제(四方軍主制)를 중심으로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주군제(州郡制)가 시행되어 통일신라시대 9주 제도의 기본이 이미 6세기 중엽에 완성되어 있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주·군까지는 중앙의 귀족이 파견되었으나, 그보다 밑인 촌락 행정은 그 지방의 유력자에게 위임해 종래의 공동체적 성격이 그대로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의의와 평가

이 비는 이렇듯 신라 중고기(中古期: 법흥왕∼진덕여왕)의 관제·신분제·사회 조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밖에 ‘답(畓)’과 같은 우리나라 특유의 한자가 비문에 보이는 점도 일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 진흥왕순수비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신라진흥왕순수비연구』(노용필, 일조각, 1996)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국보(國寶) 1(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국보(國寶)』7 석조(石造) (정영호 편, 예경산업사, 1983)
「신라중고(新羅中古) 금석문(金石文)의 인명표기(人名表記)」 Ⅰ(김창호, 『대구사학(大丘史學)』 22, 1983)
『古代朝鮮』(井上秀雄, 日本放送出版協會, 1972)
『朝鮮金石攷』(葛城末治, 大阪屋號書店, 1935)
『新羅史硏究』(今西龍, 近澤書店, 1933)
집필자
김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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