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서는 처음 왕경 6부(六部)의 소속원을 군인으로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이 있어 수도를 수비하였다. 후에 이 6부병을 통합하여 대당(大幢)을 편성하였다. 이는 중고시대(中古時代) 군사력의 기본이 되는 6정(六停) 군단의 효시가 되었다. 544년(진흥왕 5)에 진흥왕(眞興王)은 보병군단으로서 6정을 설치하였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기병군단으로서 9주(九州)에 10정(十停)을 설치하였다.
신라는 6세기 중반경 비약적으로 영토가 확장되면서 점령지에 주(州)를 설치하였다. 주에는 대당 외에 상주정(上州停: 뒤의 貴幢), 한산정(漢山停)의 전신이 되는 신주정(新州停), 우수정(牛首停)의 전신이 되는 비열홀정(比列忽停), 하서정(河西停)의 전신이 되는 실직정(悉直停), 완산정(完山停)의 전신이 되는 하주정(下州停)등 모두 6정이 편성되었다.
보병군단인 6정 군단은 주치(州治)에 배치되어 주의 이동과 함께 그 소재지가 이동되었다. 6정의 각 군단은 군단본부와 군사당(軍師幢)·대장척당(大匠尺幢)·보기당(步騎幢)·흑의장창말보당(黑衣長槍末步幢) 등의 4개의 지원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주(軍主)의 지휘를 받는 군단 본부의 병력은 군관과 병졸이 모두 왕경인(王京人) 출신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군사당은 주의 직할 성·촌(城·村)에서 징발된 농민병사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군병의 경우, 군단 본부와 보기당·흑의장창말보당이 왕경인 출신으로, 군사당과 대장척당이 지방민으로 각기 편성되었다.
군사당은 진평왕(眞平王) 26년(604)에 창설되었고, 6정의 전투지원부대로 간주된다. 대장척당은 장척(匠尺)으로 구성되어 축성공사나 부대시설물을 축조하는 기술지원부대로 생각된다. 보기당은 기병을 보유하여 유사시 긴급출동의 역할을 수행했고, 흑의장창말보당은 검은 색 군복을 입고 장창(長槍)을 사용하는 보병전투부대로 추측된다. 이러한 6정은 삼국통일 후 해체되었다.
한편 기병군단인 10정은 왕경인으로 편성되었으며, 일명 삼천당(三千幢)이라고도 불렸다. 10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국을 9주로 나누어 각 주에 하나의 정을 둔다는 원칙 하에 고루 배치한 것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10정이 544년(진흥왕 5)에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훨씬 늦은 시기인 677∼687년경에 걸쳐 9주5소경(九州五小京)이라는 새로운 지방제도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0정은 음리화정(音里火停)·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거사물정(居斯勿停)·삼량화정(參良火停)·소삼정(召參停)·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남천정(南川停)·골내근정(骨內斤停)·벌력천정(伐力川停)·이화혜정(伊火兮停) 등 10개의 정을 말한다. 10정 가운데 한주(漢州)만은 지역이 넓을 뿐더러 국방상 요지이기도 하여 2개의 정을 두었다. 이러한 10정은 지방의 정치적·경제적 중심도시인 주치(州治)와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다. 10정은 통일신라의 군사적 지방통치의 거점이었으며, 국방뿐 아니라 치안을 위한 군사조직이기도 하였다.